환향녀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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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번 병자호란과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에 대해 포스팅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우리 조선의 여인들 특히 사대부 여인들이 겪었던 비애입니다. 청은 두 차례의 호란으로 조선의 여인들을 많이 납치해 갔습니다. 정묘호란 때 이미 수만명의 조선인들을 납치하여 상당한 금액의 돈을 받고 납치된 조선인을 풀어주고 막대한 이득을 챙겼습니다. 병자호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에 쳐들어오자마자 눈독을 들인 것은 가난한 백성들보다는 돈있고 재물이 많은 사대부 집 여인들을 납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만 납치된 여인을 풀어주며 막대한 돈을 챙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태종에서 치욕적인 군신관계를 맺으며 머리를 땅에 찧으며 피가 날 정도의 의식을 치루었습니다.무조건 항복이라는 표시이며 청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게 되었으니, 일반 백성들은 청나라 군사들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당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납치된 여인들은 한시바삐 구출해 내야 합니다. 물론 돈이 문제입니다. 일반 백성들은 100냥정도면 구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대부나 양반집에서는 하루 빨리 송환하고자 100냥이면 될 것을 뒷돈까지 줘가며 여인을 구출합니다. 이러다보니 청나라 인질범들은 인질의 값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천냥까지 치솟았으니 일반 백성들은 돈이 없어 여인을 구출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여인들은 청나라에 가서 노비나 천한 일을 하며 생을 마쳤으며 그런 사람은 부지기수입니다. 청나라에 반발한 인조의 정책으로 힘없는 여인들이 많은 피해를 본 것이지요. 그런데 돈으로 여인을 구출해내도 또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시 조선은 여인의 정절을 중요시 하기 때문에 사대부의 여인들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오명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며느리, 아내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가문의 명예였지요. 그리하여 남산에서 목을 멘 여인들이 엄청 많아다고 합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남자들 때문에 여자들이 덤터기를 쓴 것이지요. 또 이혼의 문제도 심각하여 사회 문제화가 되었습니다. 청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과 함께 살 수 없으니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왕에게 간청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함부로 이혼을 할 수 없고, 왕이 허락이 있어야만 이혼이 가능했던 시기입니다. 사대부들은 대부분 환향녀 며느리들을 내쫓고 새로운 며느리를 맞아들였습니다. 환향녀가 너무 많아 사회문제가 심각해지자 최명길은 전국 고을마다 강에서 목욕을 하면 회절한 것으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회절의 강에서 아무리 몸을 씻어도 다시 며느리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또 문제인 것은 청에서 임신한 여인이 조선에 와서 아이를 낳으면 오랑캐의 아들이라 하여 호로자라고 불렀습니다. 호로는 오랑캐를 낮추어 부르는 말인데 오늘날에는 호로자, 호로자식, 후레자식 등으로 버릇이 없고 막대먹은 아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정절을 잃은 여인의 자손은 과거 응시를 할 수 없고, 출세도 금지되었습니다. 이런 환향녀들은 요즘은 화냥년이라는 용어로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변모되었습니다. 환향녀들은 비애를 느끼며 지금까지도 통곡하고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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