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초기는 왕정에서 출발합니다. 그러자 한 사람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에 반발하여 기원전 509년 왕정을 축출하고 귀족적인 공화정이 형성됩니다. 의결기구인 원로원은 300, 집정관은 2명으로 구성되어 권력을 여러 명이 나눠 다스립니다. 원로원과 집정관은 모두 귀족으로 구성되어 귀족적 공화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로원에서 집정관 2명을 선출하고 1년 임기를 마치면 다시 원로원으로 돌아갑니다. 귀족들이 권력을 휘두르자 평민들도 스스로 무장을 하여 전쟁에 참여합니다. 이 당시 전쟁은 남의 땅을 빼앗거나 곡물을 약탈하여 자기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민들은 중무장하여 전쟁에 참여하여 더 많은 이익과 토지를 얻게 됩니다. 힘을 키운 평민들은 점차적으로 정치적인 요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여 기원전 494년 민주적 공화정이 탄생됩니다. 하지만 초기에는 중무장한 평민들이 정치적인 요구를 해도 귀족들이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귀족들은 기득권을 내려 놓을 수 없었습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평민들은 성산사건을 일으킵니다. 즉 우리 평민들은 더 이상 전쟁에 나서지 않겠다고 성산에 모여 데모를 한 것입니다. 귀족들 너희들 마음대로 하고 너희들이 알아서 전쟁에 참여하라는 뜻이겠습니다. 귀족들은 평민들을 어루만지고자 호민관 제도를 탄생시킵니다. 호민관이란 평민들의 대표를 말합니다. 호민관은 원로원의 결정을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평민들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기원전 472년에는 평민회가 구성됩니다. 호민관을 선출하고 평민을 위한 입법 활동도 하며 평민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단체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원 전 450년에 12표법을 제정합니다. 이 법은 로마 최초의 성문법으로 평민을 법으로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평민들을 벌할 때 귀족들 몇 명이 모여서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처리하였지만 이제는 법으로 딱 정해져 있으니 귀족들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성문법으로 해 놨으니 그동안 관습법대로 처벌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귀족들 자의적으로 법을 해석할 수 없는 근거가 마련되었으나 아직은 귀족들의 힘이 더 센 시기입니다.

 기원 전 367년 리키니우스 법이 제정됩니다. 이제는 집정관 2명 중에 반드시 1명을 평민으로 선출해야 된다는 법이었습니다. 평민들의 힘이 점점 세져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 전 287년에는 호르텐시우스법까지 제정됩니다. 이 법은 평민회에서 논의된 사항을 원로원 동의 없이 의결하여 실행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즉 이제부터는 법적으로 평민과 귀족이 동등해졌다는 의미입니다기원 전 270년 공화정으로 국력을 키운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합니다. 당시 지중해는 카르타고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통일된 이탈리아는 영토 확장과 지중해 해상권에 대한 야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기원전 264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지중해의 해상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가 전쟁을 하는데 이를  포에니 전쟁이라고 합니다. 카르타고는 원래 페니키아가 개척한 나라로 고대 페니키아의 식민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카르타고를 라틴어로 말하면 포에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포에니 전쟁의 승자를 로마로 끝납니다. 이로써 로마는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가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정복지에서 많은 곡물이나 노예들이 로마로 유입됩니다. 귀족들은 넓어진 토지에 정복지의 노예들을 데려다가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데 이를 라티푼디움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영농들은 그동안 전쟁에 참전하느라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토지 규모도 영세하여 귀족들의 라티푼디움과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귀족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대규모로 수확물을 생산하니 먹고 살기 힘들었던 자영농은 토지를 귀족에게 팔아버리고 결국 몰락하게 됩니다. 포에니 전쟁으로 귀족들의 농장을 번성하고, 전쟁에 참전하여 열심히 싸웠던 자영농은 아이러니하게 몰락하게 됩니다. 자영농들이 몰락하니 자연적으로 공화정에 위기가 생겨납니다.

 이런 공화정의 위기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그라쿠스 형제입니다. 이들은 개혁을 통해 자영농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싼 값에 곡물을 사들여서 저가로 평민들에게 분배하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기득권층인 귀족들은 찬성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두 형제들을 암살하고 맙니다. 또 기원전 73년에는 검투사 노예 계급인 스파르타쿠스가 주동이 되어 난을 일으킵니다. 검투사 경기는 당시 로마인들의 유흥거리였는데 이들이 집단 탈주하여 무기를 들고 배수비오 산을 근거로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주변 농장의 노예들도 탈출하여 배수비오 산으로 몰려 듭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하고 로마는 삼두정치가 실시됩니다.

 1차 삼두정치는 기원전 60년에서 기원전 44년까지인데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이렇게 세 명이 권력을 독점하며 싸웠고 결국 카이사르가 승리합니다. 하지만 그는 독재권력을 휘두르다가 반대파의 암살을 당합니다. 2차 삼두정치는 기원전 43년부터 기원전 31년 까지인데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세 명이 권력을 독점합니다. 그러다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둘이 싸움을 하는데 그게 유명한 악티움 해전입니다. 이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 가 승리합니다. 악티움해전에서 이긴 옥타비아누스는 바로 황제로 즉위하지 않고 자신은 로마의 제1시민이라고 지칭합니다. 독재를 휘두른 카이사르와 반대 성향이어서 원로원은 흡족해 합니다. 그러는 사이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이 장악하자 원로원에서는 옥타비아누스를 밀어주게 됩니다. 당신은 존엄한 존재라는 뜻으로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까지 부여합니다. 이제는 황제정치 즉 로마 공화정이 로마 제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후 약 200년간 평화 시대, 5현제 시대가 도래하여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우는 로마의 평화시대가 전개됩니다.

 570년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쿠라이시 부족의 하심 가문에서 무함마드라는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메카는 지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중심지나 본산지의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메카는 무함마드가 태어난 곳으로 나중에는 이슬람교의 성지가 됩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을 무슬림이라고 하는데 무슬림들은 일생에 한번 성지순례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무함마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삼촌을 따라 상인의 길을 걷다가 청년기에는 목동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5세의 나이에 40세인 부자 미망인과 결혼을 합니다. 이제 물질적으로 풍요해졌습니다. 하지만 뭔가 그를 허전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족할 수 없었던 허전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수행의 길을 떠납니다. 그러던 무함마드가 40살이 된 610년, 여느 때처럼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40살의 무함마드에게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무함마드는 곧 대천사 지브릴(가브리엘)에게 하나님(알라)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알라는 아랍어로 하느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슬람교의 알라는 크리스트교의 하나님하고 동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트교에서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과 같은 신앙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이슬람교에서 예수는 무함마드와 같은 예언자 중 한 명이라고 여깁니다. 즉 이슬람교에서는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를 무함마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함마드는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듣고 겁에 질렸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언자임을 깨닫습니다. 무함마드는 자신의 부인을 시작으로 이 신생 종교를 포교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메카는 상업도시이며 다신교가 유행하던 도시 빈부의 격차가 심하던 도시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무함마드는 평등 사상을 전파합니다. 그러나 유일신 알라를 믿으라는 그의 포교활동에 다신교를 믿던 메카의 사람들이 무함마드를 몰아냅니다. 무함마드는 저는 당신의 영광에서 위안을 구합니다. 당신 이외는 어떤 힘도 없습니다. 라고 기도를 합니다. 무함마드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집니다. 

622년 메카에서 쫓겨난 무함마드가 북쪽의 메디나로 이동하는데 이를 헤지라라고 부르며 이 해가 바로 이슬람력의 원년이 됩니다. 메디나로 간 무함마드는 이곳에서 포교활동에 성공을 합니다. 그후 메디나에서 힘을 키웁니다. 무함마드는 역경을 극복하고 사람들을 이끈 뒤 자신을 쫓아냈던 메카를 정복하고 우상을 파괴합니다. 이 전투의 이름이 바드르 전투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 무함마드가 메카인들의 반격을 받기도 하지만 이미 이슬람교는 많은 사람들의 신앙으로 확산 중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메카인들은 무함마드를 인정하고 무함마드 군대는 630년에 메카로 무혈입성합니다. 이후 활발한 선교 및 정복활동으로 예언자로서 열정적인 삶을 살다가 무함마드는 632년 메디나에서 눈을 감습니다. 경전인 코란이 지배하는 종교사회로 무슬림들은 메카를 향애 절을 하고 라마단 기간에는 해질 때까지 음식을 먹지 않으며 가난한 자에게 기부하고 일생에 한번은 성지순례를 합니다. 우상 숭배를 금지하여 신전인 모스크에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를 그리지 않고 기하학적인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하고 첨탑을 세워 모스크의 권위를 나타냈습니다. 

 무함마드가 죽고 나자 그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툼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주도권을 잡은 메디나 세력이 무함마드의 장인이자 최측근인 아부 바크르를 새로운 칼리프로 선출하였다. 정통 칼리프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죽음을 틈타 여러 부족들이 반역을 꾀하였는데 알람의 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맹활약과 꾸준한 정복활동으로 이슬람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영토가 매우 넓어집니다.

 656년 높은 세금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3대 칼리프인 우스만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4대 칼리프로 선출하였습니다. 이때 알리의 칼리프 선출에 불복한 세력들이 반기를 들어 이슬람 제국은 결국 내전이 시작되게 됩니다.

 내전 도중 칼리프인 알리가 반란 세력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자 분노한 신하가 알리를 암살하였습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칼리프 직위를 넘겨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661년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가 이슬람 제국의 새로운 칼리프로 즉위합니다. 새로운 왕조 우마니야 왕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무아위야 1세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고 칼리프 선출제를 폐지하고 아들에게 칼리프 직위를 물려주는 칼리프 세습제를 확립합니다. 한편 알리와 무아위야의 내전 당시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족인 알리를 지지하는 세력이 따로 분리된 세력이 있는데 그들을 시아파라고 부릅니다. 기존의 이슬람 세력은 수니파로 시아파와 오늘날까지 갈등하며 종교 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우마이야 왕조는 5대 칼리프인 아브드 알 말리크 이후부터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합니다. 8세기 초에는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스페인과 포르투칼 지역까지 정복하여 이슬람 대제국을 건설합니다. 북진하여 프랑크왕국까지 공격하지만 패배하여 유럽 정복의 꿈은 이루지 못합니다. 이 전투가 투르 푸아티에 전투입니다. 이슬람 제국은 정복지의 주민들에게 차별을 가한 결과, 곧 반란에 직면하게 됩니다. 반란을 주도한 압바스 가문의 아부 알 압바스는 무함마드의 삼촌의 후손으로 그는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를 물리친 후 칼리프 마르완 2세를 몰아냅니다. 그리고 750년에 새 칼리프로 즉위합니다. 새로운 왕조 압바스 왕조의 시작입니다. 이때 간신히 살아남은 우마이야의 왕족 압드 알 라흐만은 이베리아 반도의 알 안달루스로 도망쳐 우마이야 왕조의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긴 새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 제국은 비 아랍계 무슬림 차별을 완전히 없애고 모든 무슬림들을 평등하게 대하였습니다. 거대한 영토를 거느린 압바스 왕조는 동쪽의 당나라와의 탈라스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하였습니다. 8세기 말에 즉위한 5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가 다스릴 때에는 문화 부흥까지 이루어져 이슬람 제국의 황금기가 됩니다. 동양과 서양을 잇는 실크로드로 인해 많은 문물들이 유입된 바그다드는 교역과 문화의 중심도시로 번창합니다. 유럽에서 건너온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들도 번역되어 이슬람 문화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9세기 중반에 용병으로 고용된 유목민 튀르크계 군인인 맘루크들이 칼리프 친위대의 권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결국 909년에는 시아파 세력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을 앞세워 북아프리카에 독자적인 나라인 파티마 왕조를 건국하여, 이슬람 세계는 동쪽의 압바스 왕조와 서쪽의 파티마 왕조로 분열되고 맙니다.

  이후 계속된 시아파의 공격에 시달린 압바스 왕조는 11세기 중반 아시아에서 건너온 유목민 튀르크족이 세운 나라 셀주크 투르크에게 수도 바그다드를 빼앗겨버렸고, 이후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셀주크의 지도자에게 칼리프보다 한 단계 낮은 정치지도자의 칭호인 술탄을 부여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슬람의 맹주가 된 셀주크 투르크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을 맹공하자 겁을 먹은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교황청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것이 1095년부터 시작되어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의 서막입니다. 로마교황청 뜻을 따른 연합군이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고 기독교 왕국들을 세우지만, 12세기 후반에 아이유브 왕조를 세운 살라딘이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합니다. 이후 기독교 세력의 십자군 원정은 뜸해졌으나 13세기 초중반에 동쪽의 몽골군이 뛰어난 기마술과 용병술로 중동지역을 장악합니다. 1258년에는 압바스 왕조도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였고, 한때 세계의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던 바그다드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맙니다. 몽골이 한 차례 휩쓸고 간 중동지역에는 일한국이라는 몽골인의 나라들이 생겨나는데 오래가지 않아 내분으로 멸망합니다. 

  한편 셀주크 투르크의 몰락으로 여러 작은나라들이 난립한 오늘날 터키의 아나콜리아 반도에 있는 오스만제국이 주변국들을 정복하며 점차 성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453년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킵니다. 이윽고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정복하고 동쪽의 사파비 왕조의 페르시아를 격파하며 이슬람 세력의 맹주가 됩니다. 16세기 초반 쉴레이만 1세 때에는 정복과 문화 부흥이 동시에 이루어져 오스만 제국은 전성기를 이루게 됩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거지인 빈을 두 차례나 공격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갑니다. 내부에서는 술탄의 근위대인 예니체리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져 이들이 술탄을 제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바뀌는 정도까지 이르릅니다. 이러는 사이 유럽 국가들에게 뒤처져버린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초반에 그리스와 이집트의 독립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나라의 힘을 재정비하고자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술탄 압둘마지트 1세가 1839년에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한 탄지마트 개혁을 실시합니다. 하지만 이후 오스만 제국은 크림전쟁과 이어진 러시아 - 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에게 패배하여 발칸반도의 영토들을 거의 잃어버립니다. 그러자 발칸반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열강들이 충돌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만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오스만 제국은 영국에게 구입하기로 한 전함을 영국이 양도하지 않자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반대편인 독일의 편으로 참전하게 되는데 결과는 1918년에 패전국이 되어 영토가 산산조각 나게 된다. 그리고 난후 그리스군의 침공까지 받은 오스만 제국은 아타튀르크가 그리스군을 무찌르고 터키공화국을 수립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게 됩니다.
 중동지방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중동에 식민지들을 거느린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밸포어 선언을 합니다. 즉 오스만 제국에 같이 맞서 싸우면 유대인들의 나라를 세워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체결하여 아랍인들의 나라를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렇게 모순된 이중 계약으로 전쟁 이후 중동지역은 겉잡을 수 없는 혼란이 찾아오게 됩니다. 1948년 영국의 밸포어 선언대로 유대인들은 고향인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나라 이스라엘을 세웁니다. 그러자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내세운 아랍국가들이 반발하여 이스라엘과 여러 차례 중동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1979년 시아파의 맹주 이란에서는 호메니이가 팔라비 왕조를 몰아내는 이슬람 혁명을 일으킵니다. 이웃나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과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등 미국에 맞서다가 축출되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후로도 중동은 석유를 둘러싼 이권 다툼, 이슬람 종파의 갈등,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와의 싸움, 내전 등 복잡한 문제들을 떠안은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  1974년 중국 산시성 린퉁현 여산 남쪽 기슭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양취위안이었는데 그는 우물을 파다가 철조각과 도기 인형 조각을 발견하였습니다. 양취위안과 친구들은 별 이상한 조각이 나온다고만 생각했지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수도시설 담당자인 팡수민이 우물작업의 진척이 더디자 현장을 찾게 됩니다. 평소 고고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도기 인형과 철조각을 보고 이건 진나라 시대의 도기가 아닌가 생각하며 박물관에 알리면서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발굴해 보았더니 지하에는 흙으로 만든 병사 인형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발굴하였습니다. 도대체 이 군대들은 왜 지하에서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건 기원 전 210년에 죽은 진의 시황제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 진 시황은 조나라에 인질로 갔던 자초의 아들이라고 전해집니다. 여불위라는 사람이 자초의 인물됨을 보고 그를 후원합니다. 어느 날 자초가 여불위의 집에 가서 여불위가 총애하는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를 잊지 못해 전전긍긍합니다. 자초는 여불위에게 그녀를 달라고 하여 안된다고 하였으나 결국 자초의 여인이 됩니다. 하지만 이미 여인의 배 속에는 여불위의 자식이 잉태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시황제라고 사마천의 사기에 전해집니다. 어찌하여 여불위의 소생인 시황제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태후(여불위가 자초에게 넘겨준 시황제의 엄마)는 어느 날 여불위를 만나 다시 예전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 일이 발각되는 날에는 시황제에게 죽임을 면치 못할 것 같아 노애라는 사람을 소개해 줍니다. 노애를 환관으로 위장시켜 태후궁으로 보낸 것입니다. 태후는 노애를 총애하다가 결국 노애의 애까지 가지게 됩니다. 정말 큰일입니다. 그리하여 태후는 시황제에게 말하여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살겠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태후는 노애의 애를 낳고 살아가다가 그 사실이 시황제에게 발각되어 노애를 죽이고자 합니다. 그러자 노애가 역모를 꾀하다가 죽게 되고 그 일로 여불위까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태후도 유폐당합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후 진시황은 나라의 힘을 키우며 그의 천하를 만듭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사실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것, 자초를 왕위에 올렸다는 것 등등이 일부러 진 시황제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china의 어원인 진나라는 시황제의 부국강병책으로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였습니다. 중국 최초 통일 국가를 만든 것입니다.  강한 국가만이 난세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진나라를 강하게 하기 위해 한비자의 법가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웁니다. 즉 법가 사상에 근거하여 강력한 법치로 부국 강병을 이루고 기원전 221년에  춘추전국 시대를 통일한 것입니다. 중국을 통일한 후 <나는 이제 최초의 황제다. 앞으로는 폐하라고 부르도록 한다.>라고 하며 최초의 황제 즉 시황제로 즉위를 합니다. 시황제로 즉위한 후 군현제의 운영과 관료제의 도입으로 중앙집권을 강화시킵니다. 그는 진나라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화폐와 문자와 도량량형까지 통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나라를 통치하는데 유리한 점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도량형이란 길이, 부피, 무게 등과 관련된 단위를 통일하였다는 것입니다. 도는 길이 및 길이를 재는 자, 량은 부피 및 부피를 재는 도구(되나 말), 형은 무게 및 무게를 재는 저울을 뜻하는 것입니다. 

  • 이런 진시황의 강력한 법가 사상에 근거한 통치와 중앙집권에 대해 유가 사상가들의 반발과 비판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자 진시황은 유가 사상가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하게 합니다. 그게 바로 분서갱유입니다. 승상 이사가 주장한 탄압 정책으로 역사서, 의약서, 농업서적 등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책을 불사릅니다. 그리고 유가 사상가들을 처형 또는 생매장하여 강력하게 사상을 통제합니다. 이로써 유가 사상은 크게 위축됩니다. 북방에서는 중국을 괴롭히는 흉노가 발호합니다. 시황제는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아 흉노가 중국땅을 다시 넘보지 못하도록 하고자 합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성벽들을 하나하나 연결하는 대역사를 시작하여 만리장성을 건설한 것입니다.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한 시황제는 영원한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권력을 영원히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신하들에게 불로초를 구해오라는 명령을 하달합니다.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녀보기도 하고 다른나라까지 가서 찾아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불로초를 얻지 못하고 기원 전 210년 진나라 전국을 돌아보는 순행중에 49살을 일기고 숨을 거두고 맙니다. 시황제가 죽은 후 그의 가혹한 법치와 대규모 토목 공사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 기원 전 206년에 진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 진시황의 병마용갱은 아직도 발굴 중이고 복원중입니다. 지난 번에 가보니 관광객이 엄청 많고 입장료로 비싼 편입니다.  진사황의 사후세계를 지키고 있는 지하 군대의 모습은 규모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웅장하고 병사들의 모습도 장관입니다.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도기 인형의 군사들은 열을 잘 지어 서 있었으나 군데군데 파손된 곳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한쪽에서 모아 놓고 복원하고 있는 작업실이 보였습니다. 중국 시안에 가시면 꼭 들러야 할 필수 코스인 진시황릉 병마용갱은 우리들을 벅찬 가슴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9시 뉴스를 보다 보면 뉴스 진행자가 어떤 때는 중동 지방이라고 하고, 어떤 때는 아랍이라는 말을 합니다. 둘다 같은 용어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닙니다. 먼저 중동이라는 말은 지정학적인 위치를 따져서 생겨난 말입니다. 즉 유럽 중심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중동은 아시아의 서쪽 또는 아시아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서아시아 또는 서남아시아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중동이란 말은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용어입니다. 그후 미 해군제독인 알프레드 마한이 중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면서 세계인들도 서남아시아 지방을 중동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19세기 전 세계의 많은 지역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럽과 가까운 발칸반도 지역을 근동, 유럽과 조금 더 떨어진 터키,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 이란 등을 중동, 유럽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나라를 비롯한 지역을 극동지방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들 나라와 얼마나 가깝고 먼 정도에 따라 근동, 중동, 극동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아랍이란 용어는 민족과 언어와 문화적 개념을 통털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아랍국가는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들입니다. 물론 이슬람교가 국교입니다. 이집트를 중심으로 하여 아랍의 평화와 안전을 확보하고, 주권과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아랍국가 연맹을 만들었는데 바로 <아랍연맹>입니다. 중동에 위치한 대부분의 나라는 아랍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터키는 터키어를 사용하고, 이란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들은 이슬람교를 믿고는 있으나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아랍국가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란은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할 정도로 강력한 나라였고, 아리아인들의 나라로 아랍인들과는 민족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터키도 이주해 온 오스만투르크를 세운 투르크족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터키와 이란은 아랍이 아니라 그냥 이슬람 국가일 뿐입니다. 이스라엘도 중동에 위치하고 있으나 이슬람교를 믿지 않고 히브리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더더욱 아랍국가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랍연맹과 중동 전쟁을 벌일 정도로 역사, 종교, 영토 문제로 아랍 연맹과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교에서 인정하는 종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입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 구약성경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무하마드가 유대교와 기독교를 같은 구약성서를 가진 종교라고 규정하여 유대교와 기독교에게 관용을 베푼다고 했습니다. 알라신도 유대교와 기독교의 유일신과 같은 신이라고 말합니다. 일례로 사담후세인이 미국의 침공에 항의하는 표시로 달러화를 바닥에 뿌려놓고 불도저로 깔아 뭉개는 퍼포먼스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관리가 절대로 안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왜냐하면 1달러 뒷면에 <우리는 신을 믿는다>라고 쓰여져 있는데 여기서 신은 우리가 믿는 유일신 알라와 동일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을 깔아 뭉개는 행동이므로 절대 하지 말것을 건의하였습니다. 후세인도 깜짝 놀라 이슬람 율법 학자에게 물어보니 관리의 말이 맞는 것으로 해석되어 후세인은 고심 끝에 앞면을 위에 놓고 불도저로 깔아 뭉갰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슬람교에서는 유대교이건 기독교이건 그들이 믿는 신이 모든 알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관용은 여기까지입니다. 다른 종교 즉 힌두교나 조로아스터교 등은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 이슬람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이슬람교 사회에서 철저하게 배척을 당합니다. 배교를 하면 가족들의 살해 위협까지 받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자신을 다스리며 알라신에게 의지하는 이슬람교를 무조건 나쁘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일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문제를 일이키는 것이지 대부분 이슬람교도까지 거리를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1. 전령자 2018.12.28 23:28 신고

    미륵(강증산)을 기다리는 카페

    [ http://cafe.daum.net/MKingGood ]


    진(震)방에서 성인이 나온다- 갑을(甲乙)로써 시작한다

    [ http://cafe.daum.net/MKingGood/eFgr/9 ]



    미륵증산(강증산)님의 일꾼(건달)을 받습니다

    ♣ 2018년 3월 25일부터 - 건달(일꾼) 미션을 진행합니다

    [ http://cafe.daum.net/MMMMM ]

    乾達(건달)이라는 뜻은 강증산 상제님을 만나는 사람을 뜻합니다

    乾達(건달)이란 하늘과 통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만나다)



    - 참조경전 -
    [ http://cafe.daum.net/MKingGood/dUGZ/37 ]

이집트 문명이 남긴 위대한 문화 유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아부심벨 신전입니다. 아부심벨 신전은 이집트 전성기를 이끌었던 람세스 2세의 신전입니다. 호루스 신을 위해 지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람세스 2세 자신을 위해 건축한 신전으로 추측됩니다. 람세스 2세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 4개를 입구에 나란히 배치하고, 벽에는 전쟁에서 세운 공적을 새겨 놓았습니다. 조각상은 약 20미터나 된다고 하니 그 위용이 느껴집니다. 신전 옆에는 아스완 댐 건설로 생겨난 나세르 호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아부심벨 신전은 현재보다 70m 아래 쪽에 있었는데 아스완 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유네스코의 헌신과 각국의 협력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아부심벨 신전을 옮기는 비용을 보탠 국가라고 합니다. 

둘째, 카르나크 신전입니다. 카르나크 신전은 파라오가 아몬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냈던 신전입니다. 사다리꼴 모양으로 된 세계 최대의 신전으로 신전 안에는 파피루스 모양을 본뜬 거대한 돌기둥이 134개나 빼곡하게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돌기둥의 색이 바래졌으나 각 기둥마다 람세스 2세의 업적과 이집트 신화가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카르나크 신전은 원래 모래 밑에 묻혀 있어 현재 일부분이 보수와 발굴작업이 이뤄졌으나 엄청난 넓이로 아직 조금밖에 발굴을 하지 못한 상태라고 합니다. 

셋째, 룩소르 신전입니다. 카르나크 신전의 부속 건물로 지어진 신전으로 풍년을 비는 오페트 축제가 열리던 장소입니다.오페트 축제는 카르나크 신전에 있는 아몬 신상을 룩소르 신전으로 옮기는 행사입니다. 오페트 축제때에는 황금색의 배를 타고 나일강을 한 바퀴 돌아본 뒤에 아몬 신상을 가마에 태우고 룩소르 신전에 가지고 와서 24일간 모셨다고 합니다. 아몬 신상을 모시며 풍년을 기원하던 이집트인들의 모습이 짐작됩니다.

넷째, 오벨리스크 입니다. 이것은 태양신과 관련된 돌탑으로 거대한 바위를 조각하여 만든 끝부분이 뾰족하고 모양은 사각형인 탑입니다. 오벨리스크는 여러 개를 만들었는데, 이집트를 침입한 나라들이 자기 나라로 가져가서 파리나 로마 등지에 있습니다. 현재 이집트에는 몇 개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오벨리스크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태양의 도시 헬리오폴리스의 오벨리스크입니다.

다섯째, 기자의 3대 피라미드입니다. 3대 피라미드는 쿠푸왕, 카프레왕,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입니다. 이중 가장 큰 것은 쿠푸왕의 피라미드로 가로와 세로가 230미터, 높이가 146미터나 되는데 약 270만개의 돌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피라미드는 현재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지었는지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섯째, 카프레 왕의 대 스핑크스 입니다. 스핑크스는 사자 모양을 하였으며 피라미드나 신전을 지키는 수호신입니다. 몸뚱이는 사자 모양이지만 얼굴은 파라오의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스핑크스는 테베의 암산에 살면서 아침에 네발, 낮에는 두발, 저녁에 세발로 다니는 짐승은 무엇이냐 라고 물어보고 답을 하지 못하면 잡아먹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곳에 있던 바위를 조각하여 길이 74미터, 폭 19미터, 높이 20미터가 되는 세계 최대의 조각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핑크스는 그리스어에서 괴물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로 이집트 사람들은 지평선의 호루스라고 불렀습니다. 

 중세시대 유럽에는 사람이 다치면 병원이 없어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수도원으로 기도하러 간 것이 아니라 수도원에 가면 수도승 중에 약초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간 것입니다. 수도원은 주로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 약초를 구하기 쉬웠고 또 수도승 중에는 약초에 대해 오래 연구한 사람들도 있어 약초의 효능과 비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연구에 연구를 하여 알코올이라는 물질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알코올을 상처에 발라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상처가 곪지 않고, 시간이 지나자 잘 낫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코올을 사람에게 먹여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신이 혼미해지며 마취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알코올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고마운 물이라고 하여 <생명의 물>이라고 불렸습니다. 알코올을 제조하는 방법은 수도원에서 수도원으로 전파되었고, 영국으로 넘어가 스코틀랜드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말로는 생명의 물이 <우스케 베아다>라고 하는데 그것이 변해 <위스키>라고 발음하게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도 아프면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수도원에서 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술이 필요할 경우에는 이발소로 갔습니다. 머리를 깎으러 간 것이 아니라 잘 드는 면도날과 가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늘 손에 가위와 면도날을 가지고 머리를 깎으니 얼마나 손에 익었겠습니까? 그러니 병원이 없던 그 때에는 가위가 손에 익은 이발사가 수술을 해 주면 그나마 안심이 되었나 봅니다. 수술 시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생명의 물인 위스키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발소에만 가면 위스키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또 스코틀랜드에는 위스키가 흔했습니다. 그래서 기사들은 위스키를 마시면 고통이 어느 정도 완화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힘든 전투를 끝내고 마시는 위스키로 피로를 달래곤 했던 것이지요. 원래 소독을 하려고 만들어진 위스키를 전투 후에 마신 것입니다. 이것이 발전되어 <스카치 위스키>가 되었습니다.

 한편 러시아에서도 생명의 물이 전해졌습니다. 14세기 러시아는 몽골족 때문에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언제 몽골족이 쳐들어와 또 행패를 부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스크바 공작이 된 드미트리는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이때 이탈리아 제노아라는 작은 도시국가 사람들 일부가 모스크바에 와서 살았는데 생명의 물을 드미트리 공작에게 선물합니다. 드미트리는 그것으로 부상병들을 소독하고 마취하면서 치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물 제조법을 배워오라고 시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보드카 입니다. 보드카는 술을 끓여서 생긴 물방울을 받아서 만들었다고 하여 <작은 물>, 러시아 말로 보드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수도원에서 수술을 하며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만들어졌던 알코올이 지금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술로 발전하였으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술을 적당히 마시고 운동도 하며 건강을 챙깁시다.

 낭트칙령이란 프랑스 국왕이었던 앙리4세가 낭트에서 발표한 칙령인데 칼뱅파 개신교인 위그노의 신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한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하게 신앙의 자유만 보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신교와 구교사이에 발생했던 해묵은 갈등을 타파하고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을 넘어 국민통합과 평화의 공존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낸 앙리 4세는 지금도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앙리 4세 이전의 왕들은 구교를 국교로 하고, 신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많은 탄압과 재산 몰수 등의 처벌을 하였습니다. 파파라치처럼 그 당시에도 신교를 믿는 사람들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었는데, 몰수한 재산의 25%을 위그노를 신고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위그노를 신고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다녔는데 이를 위그노 사냥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앙리 4세가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더이상 나라가 분열되는 것을 볼 수 없어서 위그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고 또 모든 국민은 신앙에 따라 차별받지 않도록 하였으며 프랑스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였습니다. 

  앙리 4세도 원래는 위그노였으나 프랑스의 왕이 되면서 구교로 개종하였습니다. 국왕 스스로 신교와 구교를 모두 껴안은 정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에게 일요일에는 냄비에 닭 한마리씩"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것은 신구교도간의 갈등에 시달린 프랑스 국민의 마음을 매우 잘 헤아린 말입니다. 국민들은 신앙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서로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냄비에서 고기가 끓는 냄새를 그리워하였습니다. 이렇게 통합과 화합, 경제적인 문제도 생각했던 것입니다.

  개신교의 입장에서 앙리 4세는 낭트칙령으로 호감을 받기는 했지만,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배신자라고 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것보다는 프랑스의 평화와 통합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함께 고생했던 신교들을 잊지 않고 낭트 칙령을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고 박해나 차별을 하지 못하게 하고 국민들의 이익울 추구한 정책을 추진한 것입니다.

  일국의 왕이라면 자신의 생각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지 앙리 4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역사책에는 '앙리 대왕', '선량왕 앙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프랑스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앙리 4세의 정책을 종교적인 갈등을 끝내고 경제적인 성장을 가져오며 유럽의 강자로 떠 올랐습니다. 하지만 앙리 4세의 손자였던 루이 14세가 등극하면서 종교적인 갈등이 다시 생깁니다.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며 낭트 칙령을 폐지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위그노들을 탄압하고 불법화 하였습니다.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하나의 군주,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률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절대왕권이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두 개의 신앙이 아닌 한 개의 신앙만 인정하게 됩니다.

  프랑스는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몽텐블로 칙령으로 위그노들이 탈프랑스 하였기 때문입니다. 위그노들이 떠난 것이 뭔 문제가 되었을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위그노들이 아주 중요한 것이 그들이 상공업 종사자였기 때문입니다. 직업 소명설을 주장한 칼뱅의 생각대로 위드노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프랑스를 떠나니 인재들이 많이 빠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상공업자를 비롯한 각종 기술자들이 프랑스를 빠져나가 프랑스의 경제가 휘청거리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망명한 곳이 영국, 프로이센, 덴마크, 네덜란드 등인데 이 국가들은 나중에 경제국 강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몽텐블로 칙령의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짐이 곧 국가다 라고 말하며 절대왕정을 꾸리면서도 위그노들에게 좀더 관대했더라면 당시에 프랑스는 세계를 제패하는 패권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낭트칙령과 앙리 4세를 읽고 강압보다는 관대함이 사람을 움직이고 나라를 움직인다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저는 작년까지 아침 저녁으로 2번씩 목욕탕을 다녀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온천으로 가서 샤워 및 탕목욕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는 9시쯤 헬스장 운동하고 난 후 온천욕으로 하루를 정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하루에 한 번으로 줄였습니다. 이사 간 곳이 목욕탕하고 멀어서 아침에 갔다오면 출근하기 빠듯하여 어쩔 수 없이 하루에 한 번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 상 온천욕은 저녁보다 아침이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차로 3분거리인 온천탕에서 샤워하고 탕목욕을 하면 정말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복 30분정도 걸리는 곳으로 이사를 가니 아침은 패스하고, 저녁에만 하게 됩니다. 저녁이 별로 안 좋은 점은 22시쯤 탕 속에 들어가면 어떤 때는 불쾌한 냄새가 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으니 불쾌한 냄새가 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샤워기로 몸을 닦고 탕 속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갑니다. 

  이렇게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목욕을 하며 하루의 피로를 풀고, 건강도 챙기며, 청결한 생활을 합니다. 인도에서는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면 그동안의 죄가 모두 씻겨 나간다고 하여 열심히 몸을 닦습니다. 그래서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루이 13세는 7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목욕을 했다고 합니다. 1601년 퐁텐블로에서 루이 13세가 태어났습니다. 왕실의 사람들은 모두 좋아하고 사람들은 루이 13세의 탄생을 축하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실의 건강을 돌보던 왕실 주치의는 루이 13세를 거의 씻기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아이들은 목욕을 잘 시키지 않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더러웠던 루이 13세를 7살이 되어서야 제대로 닦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왕실이 이러하니 일반 국민들도 닦지 않는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은 왕과 일반 백성들은 왜 이렇게 씻지 않았을까? 라는 것입니다. 닦지 않으면 지독한 냄새가 날 것이고, 몸이 더러우니 각종 세균에 노출되어 병에 걸리기 쉬운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터키에서 온 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 안에는 쥐들이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쥐들은 병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병균이 퍼지고 퍼져 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그 쥐들이 가지고 있던 병균이 페스트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창궐하게 된 것입니다. 한번 걸리면 생존하기 어려웠습니다. 

  도대체 이 병균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염이 될까? 페스트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던 사람들은 목욕을 하면 흑사병 병균이 피부를 통해 내 몸안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물을 통하여 흑사병이 전염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흑사병 전염 경로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목욕을 하지 않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냄새가 나고 더러웠습니다. 하지만 목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흑사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흑사병이 전염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올바른 대처 방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흑사병으로 인하여 유럽 전역에 죽음의 공포가 깊게 드리워졌습니다. 흑사병은 이내 전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무서운 속도로 전염되어 유럽인 25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목욕을 하지 않았는데도 흑사병이 계속 창궐하자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도대체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신에게 더욱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목욕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흑사병을 일으킨다고 멀리했던 목욕이 청결과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는 행동이 된다고 믿게 된 원인이 뭘까요? 그건 세균학자 파스퇴르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s자 형태의 플라스크로 실험했는데 세균은 중간에 걸러져 침투할 수 없고 오로지 공기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실험결과를 얻었습니다. 즉 질병의 원인이 세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목욕을 하면 오히려 세균을 떨쳐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보다 더욱 자주 씻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페스트 등의 감염병에 대한 정확한 원인을 몰라 이러한 병이 물을 통해 감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욕하기를 두려워하였으나 파스퇴르의 실험결과 세균의 존재와 페스트가 공기로 감염된다는 것을 알게 된것입니다. 또 더러운 것을 만지면 세균이 손에 묻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손에 묻은 세균을 없애거나 위생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목욕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청결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목욕용품이나 시설이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고, 요즘에는 목욕을 통한 치료와 온천을 통한 한방치료를 하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 약을 먹지 않고도 치료가 이루어진다니 목욕치료가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아침 저녁 너무 피곤하고 미세먼지나 황사가 극성인데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도고온천에 가서 맥반석 사우나와 온천치료를 해야겠습니다.

  

인류 최초이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현재의 이라크지역에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흘러 다른 중동지방보다는 비교적 물이 풍부한 편입니다. 이곳에서 발생한 고대 문명을 저는 중학교 때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문명 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럼 메소포타미아의 뜻은 무엇일까요? 메소포타미아 라는 지명이 있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일까요? 아닙니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두 강 사이에 위치하여 강물에 떠내려 온 흙이 쌓이면서 넓은 평야지역을 이루게 됩니다. 이 땅은 많은 거름기를 함유하고 있어 농사가 잘되는 땅이었습니다. 이 넓은 지대의 모습이 초승달 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비옥한 초승달이라고 불렸는데요. 메소포타미아는 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두 강이 흐르고 있어 이 지역에는 많은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지요? 아닙니다. 이 지역의 연간 강수량은 매우 적은 편입니다. 그런데도 이 지역에 강이 있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그건 이 지역의 북쪽 산간지대에서 시작된 물이 흘러 내려서 강을 형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두 강의 하류 지역에는 수메르 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두 강의 하류지역을 수메르라고 부르며,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을 수메르 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수메르 인들은 북쪽 지방에서 남으로 이주한 사람들인데 이미 농사기술을 터득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농사도 잘 되는 지역에서 농사 기술을 알고 있는 수메르인들은 많은 양의 곡식을 수확하기도 했지만 유독 홍수가 많은 지역이라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신에게 빌어보기도 하고, 힘 닿는 대로 관개공사를 통해 토지를 넓히고 홍수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수메르 인들이 노력한 결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때 대표적인 큰 도시는 유프라테스 강의 하류에 있는 우르크였습니다. 이 우르크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을 꽃피우고 도시도 발달했으니 수메르 인들은 살기 좋았겠지요. 하지만 아직도 위협요소가 있는데 그건 바로 홍수의 피해가 크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관개공사를 잘해도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상류에서는 물이 빠르게 흐르다가 하류에 와서는 퇴적 작용이 있어 퇴적물이 쌓이고 쌓여 물길을 막습니다. 그러다가 막힌 물길이 강둑을 넘어 들판으로 흘러 들어가 농경지를 쓸어버립니다. 애써 만든 농경지와 재배한 농작물이 쑥대밭이 되니 정말 홍수가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전쟁이었습니다. 잦은 홍수로 인해 우리들이 먹을 것이 없으면 다른 지역을 침입하여 식량을 약탈해 와야겠지요.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평야지역이라 다른 지역을 쳐들어가기 무척 쉬웠지요. 그래서 심심하면 전쟁을 하고, 다른 도시의 곡식을 약탈해 오는 것이 반복되어 사람들은 전쟁의 불안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뭔가 해결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거대한 지구라트라는 신전을 건설합니다. 수메르 인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니 신전을 만들어 신들에게 빌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전에는 전쟁의 신, 농사의 신 등 다양한 신들을 신전에 모셔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웃기는 것은 수메르 인들은 수메르 인들이 모셨던 신들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신이 아니라 무서운 재앙을 내리는 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에게 빌때에는 "농사가 잘 되게 해주세요." 가 아니라 "제발 우리 지역에 홍수 피해를 없도록 해주세요." 라고 빌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후의 세상을 빌은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바라는 것을 빌었습니다. 현실 세계가 살기 힘들어서 죽은 후의 세계를 생각조차 못한 것이지요.

  이렇게 현실 세계에서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했던 수메르 인들은 달력을 세계 최초로 만들어 냅니다. 수메르 인들은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삼아 달력을 만들었기에 수메르 인들의 달력은 태음력입니다.

  또 수메르 인들은 인류 최초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합니다. 바로 쐐기 문자인데, 문자의 모양이 쐐기처럼 생겼다하여 쐐기문자라고 부릅니다. 


최초 메소포타미아 통일 왕국 아카드 제국

메소포타미아 여러 도시 중 니푸르라는 도시는 최고신인 엔릴을 모시는 도시였습니다. 엔릴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최고신이므로 자연스럽게 니푸르 도시를 차지하는 왕을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니푸르는 원래 메소포타미아 최고 도시인 우르크의 지배를 받았으나, 차츰 남쪽으로 밀고 내려온 아카드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카드 도시국가는 점차 힘을 길러 사르곤 왕 때 수메르를 정복하고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통일하였습니다. 사르곤 왕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상류와 지중해 지역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이 국가가 바로 아카드 제국입니다.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대왕

함무라비 왕은 함무라비 법전을 만든 사람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의해 귀족들도 죄를 지으면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되고 또 자기 멋대로 펴인이나 노예들을 사적으로 처벌할 수 없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재판을 통해 법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지는 예나 지금이나 돈이 없어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 격차로 말미암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거지들은 먹고 살 것이 없어 동냥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자기도 먹고 살기 힘들어 남에게 동정을 베푸는데 인색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의 사회 전반의 부를 차지하여 일반 사람들은 그저 팍팍한 일상을 보내지 않는가 생각을 해 봅니다.

 지금은 아무나 거지가 될 수 있습니다. 무조건 가난하거나 사업하다 망하면 서울역이나 공원 등에서 노숙자의 삶을 살며 미래 없는 생활을 비관하며 술병에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지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버린 담배꽁초도 소중한 보물인양 탁탁 털어 불을 붙여 피우지요.

 하지만 예전 유럽에서 거지가 되려면 거지 허가증을 받아야만 동냥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12세기 유럽은 비단길을 통해 아시아와 활발한 무역을 하면서 경제가 매우 발전하였습니다. 상공업자들은 돈을 많이 벌며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지요. 하지만 이 당시 사회는 기독교를 중시하는 사회여서 돈만 추구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신이 아닌 돈을 추구하는 것이 보기 좋을리 없겠지요. 그래서 상공업자들과 같은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즉 거지들에게 적선을 하며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지들은 가만히 앉아서 부자들의 적선을 받아가며 쉽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4세기 중반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과 대기근은 수많은 신규 거지들을 쏟아 냈습니다. 유럽 전 인구의 20%정도가 거지였다니 시내를 걷다보면 마주치는 것이 맨 거지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의 의지로 거지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적선을 받으면 아주 쉽게 먹고 살 수 있는데 힘들게 일할 필요가 없던 것이지요. 부자들은 더 많은 적선으로 천국을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구요.

 아! 그런데 너무 많은 거지로 사회 문제화 되었겠지요. 그래서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는 거지 면허증을 받아야만 거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였습니다. 거지가 될 수 있는 자격에는 농촌 빈민, 고아 등 최하위 계층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었습니다. 이후 시에서는 주기적으로 거지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거지들이 동냥하면 불심검문하여 거지 면허증이 있는지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합법적인 거지만 동냥할 수 있게 한 것이지요.

 이 방법이 효과가 크자 다른 나라에서도 앞다투어 거지 면허증을 발급하였습니다. 영국에서는 거지 면허증 없이 동냥을 하다 적발되면 처음에는 태형과 감금, 그다음은 태형과 귀 절단, 세번째로 걸리면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지요.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엄하게 법을 만들고 몇 번 걸리면 사형에 처했지요. 하지만 먹고 살기 힘든 면허증 없는 거지들은 면허증 위조라는 방법을 썼지요. 그러다가 재수없이 걸리면 심한 벌을 받았습니다. 또 면허증 없는 거지들을 전문적으로 고발하는 거파라치도 있었습니다. 일명 거지 사냥꾼이지요. 그럼에도 거지 수는 계속 늘어나고 단속도 너무 힘들어지자 17세기에 이르러서 거지 면허증을 폐지하고 동냥하는 것 자체 또는 폐지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아다니는 거지들을 노동에 투입시키거나 수용소에 감금시켜 버린 것이지요.

 지금도 해외 유명 관광지에 가면 꼭 동냥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분들이 진짜 거지인지, 아니면 직업적인 거지인지 잘 모르겠으나 옛날 같으면 면허증이 꼭 있어야 되겠지요.

참 재미있는 거지 면허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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