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가야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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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경주 지역 토착민 집단과 이주민 집단이 결합되어 사로국에서 시작되어 발전해갔습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발전한 신라는 고대국가로 발전도 늦었습니다. 왕위도 박씨, 석씨, 김씨 등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가 내물왕 때부터는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신라의 왕호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왕으로 바뀌었습니다. 내물왕 때 왕의 칭호는 마립간이었는데 대군장이라는 뜻입니다. 백제와 왜의 공격을 받자 내물왕은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여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왜군을 축출하였으나 고구려의 내정 간섭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경주 한 고분에서 출토된 호우명 그릇에는 고구려와 신라 간의 교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내용과 고구려가 신라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간섭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눌지왕 때 백제의 비류왕과 나제동맹을 맺었으며, 고구려 묵호자가 불교를 전해주기도 하였지만 공인되지는 못했습니다. 소지왕 때에는 백제 동성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였습니다. 지증왕은 우경을 실시하고 순장을 폐지시키고 동시전을 설치하여 상행위를 감독하였습니다. 국호를 신라로 고치고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이사부를 시켜 울릉도를 복속하였습니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불교가 왕권 강화 및 중앙 집권을 위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상대등을 설치하여 국정을 총괄하도록 하였으며 김해의 금관가야를 복속하였습니다. 법흥왕은 독자적인 연호인 건원을 사용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신라 전성기를 이룩한 왕입니다. 독자적 연호인 개국을 사용하였고 거칠부로 하여금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도록 하였습니다. 화랑도를 정비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백제와 함께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다가 백제의 성왕과 전투를 벌여 성왕을 전사시켰습니다. 한강을 확보하여 당항성을 중심으로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었으며, 대가야까지 정벌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정복지마다 기념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진흥왕 순수비입니다. 단약적성비, 북한산비, 마운령비, 창녕비, 황초령비 등이 있습니다. 

 가야는 변한 지역의 풍부한 철과 벼농사를 토대로 발전하여 6가야가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김수로가 낙동강 유역에 세운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풍부한 철 생산과 해상교통을 바탕으로 중계무역을 통해 번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요청을 받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 금관가야는 쇠퇴하고 힘의 중심이 대가야로 옮겨갑니다. 대가야는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었는데 지금의 고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정치적으로도 불안하여,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신라와 백제에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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