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무굴제국과 타지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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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마지막 왕조 무굴제국

무굴제국의 기원은 몽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무굴이라는 말이 몽골지방에서 온 새로운 사람들이란 페르시아러입니다. 티무르제국이 망한 후 티무르 제국의 부활을 꿈꾼 티무르 제국의 후손이었던 바부르가 북부 인도를 거점으로 하여 나라를 세웁니다.

무굴제국에는 여러 왕들이 있습니다만 왕권이 강력했던 왕 아크바르 왕, 아우랑제브 왕, 그리고 타지마할 묘를 만든 샤 자한 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아크바르 황제(악바르 황제)>

제가 학교 다닐때에는 세계사 선생님께서 악바르 대제라고 말씀하셨으며 교과서에도 악바르 대제라고 씌여져 있던 것 같습니다. 둘다 같은 말입니다. 아크바르나 악바르나 둘다 발음이 세서 혹시 이 왕은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또는 악하게 다스려서 이런 이름이 붙었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름만 그렇다 뿐이지 실제로는 관용적인 정책으로 순하고 착한 임금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아크바르 대제 때에 무굴제국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습니다. 무굴제국의 영토도 많이 확장시킨 왕입니다.

아크바르 대제가 나라를 다스리던 인도는 토착신앙인 힌두교가 있었습니다. 힌두교는 소를 신성시하는 종교입니다. 무굴제국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제국인데 힌두교도들을 어떻게 했을까요?

아크바르 대제는 힌두교도들을 심하게 탄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달래고 어루만져주고 인정해주는 관용정책을 썼습니다. 대표적으로 관용정책으로는 기존 힌두교도들에게는 지즈야라는 세금을 걷었습니다. 그런데 아크바르 대제는 지즈야 세금을 폐지하였습니다. 이렇게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적당히 섞어서 나라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고자 노력했던 왕입니다. 비이슬람교도 끌어안고 무굴제국을 진정한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훌륭한 왕이라서 대제라는 칭호가 잘 어울리는 왕입니다.


<샤 자한 왕>

부인과의 로맨스도 있었지만 말년이 비참했던 샤 자한 왕. 왕위가 뭔지 아비와 자식간에도 공유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라는 것을 샤 자한 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부인은 뭄타즈 마할입니다. 샤 자한은 평소 뭄타즈 마할은 완벽한 여인이라고 하며 왕비를 사랑합니다. 둘 사이는 원래 결혼하기 어려운 사이였습니다. 샤 자한의 정적이 뭄타즈 마할의 이모였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그들은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다른 부인들과는 그냥 그렇고 그런 사이였지만 뭄타즈 마할과는 너무 좋은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자녀들도 14명이나 보았습니다. 하지만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그만 뭄타즈 마할이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녀를 너무 사랑했던 샤 자한. 너무나 큰 상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위해 묘당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인을 위한 무덤 타지마할 입니다.

샤 자한이 타지마할을 건축하면서 상당한 양의 국고를 쏟아부어 국고가 바닥나게 됩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타지마할 건설을 중지할 것을 여러 차례 건의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그때 건설을 중지했다면 지금 타지마할이라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볼 수 없었겠지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인도 건축물의 상징입니다. 태양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하얀색의 대리석은 각각 다른 빛깔로 변하기 때문에 너무나 장관입니다. 

입구에는 수로가 있으며 정원은 좌우로 잘 대칭되어 안정감과 균형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일출이나 일몰 때 야무나 강에서 바라보는 타지마할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꼭 봐야 할 타지마할 여행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입장료는 1,000루피로 인도 여행지 중 비싼 입장료에 해당합니다. 우리나라돈으로 환산하면 약 16,500원 정도 들어갑니다. 각국의 여행객들이 늘 북적북적거리는 타지마할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장소입니다.

 웅장함, 아늑함, 아담함, 약간의 소박함마저 느낄 수 있는 타지마할. 꼭 가봐야 할 여행지입니다.


 타지마할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일명 붉은 성이라고 불리우는 아그라성이 있습니다. 붉은 성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붉은 사암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샤 자한이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유폐되어 말년을 보낸 곳입니다. 이곳에서 병약했던 샤 자한이 타지마할 무덤을 바라보며 유폐된 모습을 생각하니 권력 무상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샤 자한 왕을 보면서 공민왕이 생각납니다. 공민왕도 원나라 공주였던 노국공주와의 로맨스로 유명하지요. 샤 자한은 왕비를 위해 타지마할 묘를 조성하고,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영전 건설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였지요. 말년도 비슷합니다. 샤 자한은 자식에게 버림 받아 유폐되어 쓸쓸하게 죽었고, 공민왕은 홍륜과 최만생에게 암살을 당하지요. 하지만 차이점도 있네요. 샤 자한은 14명이나 자식을 두었는데 공민왕과 노국공주 사이에는 한 명의 자녀도 얻지 못했습니다. 


아우랑제브(샤 자한의 세번째 아들)

 샤 자한이 늙고 병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병약한 왕을 대신하여 장남이 나라를 다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동생들은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이 기회다. 내가 이 나라를 통치해야 하는데....'

여러 형제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리고 피비린내 내는 왕자들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꼭 우리나라 조선시대 이성계가 병약하여 이방원과 다른 왕자들이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인 결과 세 번째 아들인 아우랑제브와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리하여 큰 형이었던 다라 시코를 처형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버지 샤 자한도 아그라성에 유폐시키고 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찾아보지도 않은 아주 불효막심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샤 자한이

  "나는 이제 권력도 없다. 먹는 것도 그렇고 여기가 매우 추워서 지내기 어렵구나.! 이렇게 애비를 박대해도 되느냐?"

이렇게 편지를 써도 아우랑제브는 전혀 아버지를 위한 어떠한 효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참 비정하지요. 자신의 왕권에 방해가 될 지도 모르는 아버지였기에 아마 비정하게 대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아우랑제브는 왕위에 오르자 이슬람 중심의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는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이슬람교도들에게 폐지시켰던 세금 지즈야를 부활시켰고 이슬람교 이외의 사원이나 학교는 파괴시킵니다. 세금을 부활시킨 것은 타지마할 묘를 건축하면서 엄청난 양의 국고가 낭비되어 이를 보충하기 위해 걷은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그가 즉위한 후 한참 후에 지즈야 세금을 걷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는 이슬람만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비이슬람교를 탄압하고자 부활시킨 정책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이렇게 이슬람교만을 위한 임금이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비이슬람교도들은 그의 정책에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나라의 영토도 남인도까지 넓혀서 무굴제국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엄격한 이슬람교적인 생활태도를 강요하고, 비이슬람교도들을 탄압하다 보니 반란의 여지를 만들어 준게 실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우랑제브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자기 어머니 묘 타지마할을 조성하면서 막대한 예산이 들어갔으므로 자신이 죽은 후에는 자기 무덤에 절대로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즉 규모가 작은 무덤을 만들라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그의 무덤은 당시의 왕 무덤보다 규모가 작고 소박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지붕도 없으니 어머니 묘와는 다르게 비가 오면 그대로 비를 맞는 그런 무덤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무굴제국은 지리멸렬해 졌습니다. 힌두교도, 시크교도들의 반란과 서양세력의 침입으로 무굴제국은 결국 멸망의 길로 떨어집니다.


무굴제국은 인도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교묘히 혼합되어 문화를 발전해 나갔습니다. 인도 전통종교인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혼합한 새로운 종교인 시크교가 탄생되었으며 건축 양식도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요소가 곳곳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들은 우르드어도 사용하였는데 이 언어는 이슬람 국가에서 온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그리고 튀르크어가 혼합된 언어였다고 합니다. 즉 다른 문화와 토착 문화를 잘 섞어 발전한 무굴제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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