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옹주 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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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갑 년에 태어난 아이는 그 어버이를 비슷하게 닮는다고 합니다. 진짜 고종의 회갑이었던 1912년 옹주가 태어났습니다. 그동안 딸들이 병으로 모두 죽었는데 회갑 년도에 태어난 딸은 고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과 관련하여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여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옹주는 너무나도 귀한 존재였습니다. 고종은 늘 옹주를 데니고 다녔으며 옹주를 위해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까지 만들었다고 합니다. 옹주를 위해 친구들과 함께 다니며 외롭지 않도록 하려는 고종의 조치였습니다. 유치원에 다닐 때에는 나이는 비록 제일 적었지만 조용한 성격으로 품위가 넘쳐났으며 머리가 좋았다고 합니다. 이 옹주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옹주 덕혜입니다. 고종의 쓸쓸한 말년은 덕혜옹주로 인해 삶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늘 총명하고 재주가 많아 귀여움과 사랑을 많이 받았던 덕혜옹주에게 시련의 서막이 오릅니다. 그건 바로 고종의 죽음입니다.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런 고종의 죽음은 덕혜의 삶을 송두리째 휘둘리게 만듭니다. 덕혜의 나이는 불과 8살이었는데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죽음에 덕혜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고종의 죽음으로 덕혜는 어머니 거처에서 지내다가 고종의 삼년상이 끝나던 10살 무렵에 덕혜에 대한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하게 됩니다. 일제는 조선의 황족을 없애기 위해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고 감언이설로 1925년 일본으로 데려갑니다. 옹주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거처하던 집에서 생활을 하였다. 이방자 여사는 "덕혜 옹주가 도착한 날 밤 난 침대에서 옹주를 지켜보았다. 조용히 잠든 앳돈 얼굴에 애수가 서려 있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옹주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깃들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나를 매료시켰던 발랄하고 영롱한 눈빛은 찾아볼수 없었다."라고 아픈 마음을 표현하였다.

  어린 나이에 일제에 의해 어머니와 떨어져 강제로 오게 된 일본, 기댈곳 하나 없던 옹주는 고종의 독살을 의심하며 독살을 염려해 항상 자신만의 물병을 들고 다녔습니다. 1926년 순종의 죽음과 1929년 17세때 친어머니 양씨마저 세상을 떠나자 옹주는 정신적으로 매우 피폐해졌습니다. 말 그래도 이국땅에서 완전 고아가 된 것입니다. 학교가 시작되어도 가지 않고 종일 방에서 식사하러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심한 불면증으로 어떤 때는 갑자기 밖으로 튀어나가 밖을 걷고 있어 정신과 선생이 조발성 치매라고 진단하였습니다.

 한편 조선인들은 일본땅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일제가 덕혜옹주를 대마도 백작과 정략결혼을 강행한 것입니다. 결혼과 더불어 옹주의 병은 차츰 회복되는듯 하였으나 다시 결혼 6개월만에 재발하고 맙니다. 결혼 후 딸 정혜까지 얻으며 다소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덕혜는 조현병으로 고생합니다. 정신병원으로 옮겨진 덕혜는 이혼을 하였습니다. 1956년 딸 정혜의 실종도 있어 상당한 정신적인 고통이 뒤따랐을 것입니다. 조국의 광복 소식을 듣지만 광복 이듬해 정신병원에 들어가 약 1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덕혜옹주가 고국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정부의 반대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50세가 되던 1962년 1월 간신히 조국 땅을 밟게 됩니다. 하지만 집이 아닌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지내야 했는데  56세가 되어서야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와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낙선재에서 생활하던 옹주는 1989년 4월 21일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 귀국 후에도 병으로 고생을 하며 불운한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가 1983년 정신이 맑을 때 쓴 낙서가 전해집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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