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가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메탈리카와 메가데스가 이야기가 있다고 하며 책을 권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제가 제일 좋아했던 그룹이 메탈리카였기 때문에 후배는 제가 생각났다면서 문자를 보내 왔습니다. 대학교 재학 시절에 취미로 그룹사운드에 들어갔는데 이내 저는 메탈리카의 음악에 흠뻑 빠져 버렸습니다. 그동안 듣지 못한 기타의 웅장함, 베이스, 드럼, 보컬 모두모두 좋았습니다. 특히 저는 너무 시끄러운 헤비메탈보다는 약간 느리면서도 애절한 기타 독주가 있는 슬로우 메탈이 더 좋아하지만 메탈리카 사운드는 뭔가 나를 이끄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룹사운드 발표회 시 꼭 메탈리카 음악을 1~2곡씩 연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어떻게 치는 지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쭉 기타를 쳤어야 하는데 직장 잡은 후에는 별로 기타를 칠 일이 없었고, 또 한곡을 연습하려면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꾸준히 연습해야 하는데 그럴만한 시간도 없다보니 지금은 일주일에 1번 정도 기타를 잡는 것 같습니다.

 메탈리카 음악을 듣던 저는 어느 날 휴게소에서 파는 CD에서 "Symphony of Destruction"이라는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저 노래는 기타 소리는 좋은데 노래가 영 이상해서 어떤 가수인가 봤더니 메가데스였습니다. 기타 소리가 그냥 좋아서 구입하여 차에서 계속 들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후배가 메탈리카에서 퇴출되어 나온 사람이 메가데스를 만들었다고 문자를 보낸 것입니다.

 어허! 그 책 재미있겠는데 생각하고 바로 서점에 가서 책을 사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목차를 보니 97쪽에 그 내용이 있어 그 부분부터 읽었습니다.  97쪽에는 <메탈리카에서 하루 아침에 쫓겨난 남자> 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읽어 보니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음반 제작을 위해 첫 녹음을 하기 직전 밴드는 기타리스트 데이브 머스테인을 쫓아냈습니다. 머스테인은 '뭘 잘못했지! 아, 음반 제작이란 어느날 하루 아침에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닌데...' 달랑 버스표 한장을 들고 쫓겨난 그는 자신을 쫓아낸 멤버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합니다. 

'너희들이 후회하도록 만들어주리라. 너희들은 날 쫓아낼 것에 대해 눈물로 목욕을 하리라.'

 한동안의 방황을 끝내고 머스테인은 악마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작업에 몰두하여 2년 뒤 마침내 음반을 제작합니다. 음반은 약 50만장이나 팔렸습니다. 이 밴드가 바로 메가데스입니다. 메가데스는 이후 열심히 음악 활동을 하며 음반을 2500만장 이상을 팔았습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이렇게 승승장구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를 쫓아낸 밴드가 메탈리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메탈리카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들을 확보하며 1억 8000만장 이상 앨범을 팔았습니다. 이 사실에 머스테인은 여전히 자신은 실패자라고 생각합니다. 성공의 기준이 바로 메탈리카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기준을 자신과 자신의 음악이었다면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인데 메탈리카와 비교했기 때문에 여전히 실패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엄청나게 돈을 벌고 수많은 팬들이 그를 영웅시 해도 여전히 실패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어디에 가치를 둘 것인지, 그리고 어떤 기준으로 실패와 성공을 가를 것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입니다. 경운궁이란 경사스러운 기운이 모여 있는 궁궐이라는 뜻입니다. 이 궁은 원래 조선시대 세조임금의 손자이고, 추존왕인 덕종의 아들이며, 성종 임금의 형입니다. 추존왕 덕종이 죽자 세자빈 한씨도 출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라에서 월산대군과 자을산군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계산에 의해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성종입니다.

 그러다가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 임금은 난을 피해 의주까지 몽진을 합니다. 우여곡절끝에 전쟁이 끝나고 선조는 다시 한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한양의 경복궁은 이미 폐허가 되어 왕이 머물곳을 찾다가 월산대군의 집을 궁궐도 사용하게 됩니다. 왕이 머물기에는 협소한 편이어서 주변에 있는 관리들의 집을 궁궐로 편입시킵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도 경운궁에서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러다가 나라가 안정되고 재정이 좋아지자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인조 반정에 의해 쫓겨납니다. 

  인조는 광해군처럼 창덕궁에서 정치를 합니다. 그리고 경운궁에 있던 가옥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선조가 정치를 보던 석어당과 즉조당만 남겨 두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경운궁은 궁궐로서의 수명을 다합니다. 하지만 1897년 다시 궁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1895년 야만스러운 일본 깡패들이 명성황후를 죽이고 시신을 훼손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고종은 급히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은 다시 새로운 거처로 돌아오는데 그곳이 바로 경운궁입니다.

  그리고 1897년 10월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렇게 경운궁은 조선의 으뜸 궁궐도 거듭나게 됩니다. 하지만 다 쓰러져가는 나라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애를 쓰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습니다. 1905년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일본과 강제로 맺게 되는데 그 암울했던 역사적 사건이 경운궁 중명전에서 있었습니다. 을사늑약은 일본의 강제에 의한 것이라고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지만 오히려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로 퇴위당하는 수모를 받습니다. 이젠 황제에서 퇴위되었으니 경운궁은 더이상 고종을 위한 궁궐이 아니었습니다. 고종의 아들 순종은 경운궁에서 머물지 않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다시 옮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고종이 계신 경운궁을 <덕을 누리면서 오래 사십시오.>라는 의미로 덕수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경운궁이 아니라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한일 강제 병탄이 있은 후 일본은 덕수궁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일제 유원지인 중앙공원을 만들고, 일본 관리들이 묵는 여관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궁궐터는 공원으로, 여관으로, 도로로, 학교로, 미술관으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더욱 위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국전쟁에서 폭격을 맞을 뻔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김영환 장군이 지켜냈지만 덕수궁은 주일공사 김용주의 역할이 컸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전세를 역전한 인천상륙작전 시 맥아더는 서울 폭격 장소로 덕수궁을 지목합니다. 미군 해병대에서 적의 동태를 파악했는데 인민군들이 임시기지로 삼은 덕수궁에 모여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미군 지휘부는 덕수궁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때 맥아더에게 다급한 면회 신청을 하고 간곡하게 폭격 철회를 요청한 사람이 바로 주일대사 김용주입니다.

  또 덕수궁을 지켜낸 미국인 포병부대 제임스 해밀턴 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덕수궁을 폭격하는 것은 양심상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한 나라의 문화 유산을 단 몇 초만에 모두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고 지휘부에게 명령 재고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휘부에서는 "인민군이 모두 빠져 나갈 때까지 기다려라. 덕수궁 폭격은 취소한다."

 이렇게 한국전쟁 시 없어질 뻔한 덕수궁을 지킨 두 사람, 김용주와 제임스 해밀턴 딜

 제임스 해밀턴 딜은 나중에 한국전쟁을 떠올리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오늘날 덕수궁이 잘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 참 흐뭇하고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날 내가 내린 판단과 행동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잊을 수 없다."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한 나라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들이 덕수궁 나들이를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고마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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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용 쓰레기를 분리 배출하면서 어떤 아파트에서는 경비원이 주민에게 폭행을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경비원이 주민에게 비닐류와 플라스틱류는 당분간 분리배출하지 말고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리라고 해서 화가 나 폭행했다고 합니다. 중국이 재활용품을 수입 금지하니 우리나라 각 아파트에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올바르게 배출해야겠습니다. 

  그러면 올바른 생활폐기물 배출요령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재활용 가능 자원 분리 배출의 핵심은 4가지입니다. 

첫째, <비운다>입니다. 용기 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을 깨끗히 비유고 배출해야 합니다.

둘째, <헹군다>입니다. 용기 안에 있는 이물질, 음식물 등은 닦거나 헹궈서 배출해야 합니다. 특히 담배꽁초 가득 넣어 버리면 안 됩니다.

셋째, <분리한다>입니다. 라벨 등의 다른 재질로 되어 있는 부분은 제거한 후 배출해야 합니다.

넷째, <섞지 않는다>입니다. 종류별, 성상별로 구분하여 분리 수거함으로 배출해야 합니다.

 다음은 플라스틱이나 비닐류 등의 분리 배출 요령입니다.

 첫째, 페트병 등의 플라스틱 용기는 음식물 등 내용물을 깨끗이 비우고, 부착된 상표 등 다른 재질로 된 부분 제거하여 압착한 후 배출합니다. 페트병 같은 경우는 압축한 후 뚜껑을 닫으면 압착된 상태로 배출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기타 플라스틱류는 다른 재질을 제거한 후 배출해야 합니다. , 알약 포장재, 카세트테이프 등 여러 재질이 섞이고 분리가 어려운 제품은 종량제 봉투 등으로 배출하는 것이 좋습니다.

셋째, 필름류와 같은 비닐류는 내용물을 비우고 다른 재질로 된 부분(부착상표 등)을 제거한 후 배출합니다. 음식물 등 이물질이 묻었으면 씻어서 배출하며 이물질 제거가 어려운 경우에는 종량제 봉투로 배출해야 합니다.

넷째, 스티로폼과 같은 발포합성수지는 내용물을 완전히 비우고 부착상표 등을 제거, 이물질이 묻었으면 씻어서 배출합니다. TV, 냉장고 등 포장·운반에 사용된 스티로폼은 되도록 제품구입처로 반납하는 것이 좋습니다.

케냐에서는 비닐 포장재를 사용하기만 해도 몇 천만원의 벌금이 나온다고 합니다. 국민 평균 소득이 20여만원 정도인데 비닐 봉투 하나 사용했다고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동물의 낙원인 케냐가 비닐봉투로 인해 동물들이 죽거나 병에 걸려 결국 인간에게도 피해를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다같이 분리배출 요령을 잘 익혀 재활용되는 생활폐기물이 많아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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