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영화 <007 시리즈>

총 24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고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남자 배우들 모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21번째 007시리즈에서 본드걸 여배우 섭외에 어려움이 많았다. 영화 촬영을 시작해야하는데 여주인공인 본드걸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섭외하고자 하면 여배우들 모두 하나같이 거절을 했다. 당대 최고 인기 영화인 007에 출연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이상하게도 모두 거절을 했다. 거절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본드걸의 저주에 걸리고 싶지 않다.>라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본드걸의 저주란 무엇인가?

그것은 007 시리즈에 본드걸로 출연한 여배우가 다음 흥행작을 내놓지 못하고 쓸쓸히 영화계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1962년 최초의  007시리즈 제1탄이 제작되었다.  <007살인번호>에 출연한 우슬라 안드레스(1대 본드걸)은 육감적인 몸매를 한 배우였다. 영화의 장면에서 하얀 비키니를 입고 바다에서 백사장으로 걸어나오는 장면이 당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그녀가 입었던 하얀 비키니 수영복은 세계적으로 히트되었다. 하지만 1대 본드걸로서 엄청난 인기와 관심을 끌었던 우슬라 안드레스는 007영화 이후 총 12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모두 흥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쓸쓸히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멀어져갔다.

1998년에 이르기까지 수십 명에 달하는 본드걸들이 007영화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나 007 영화가 끝난 후에는 출연하는 영화의 흥행실패로 몰락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드걸의 몰락을 본드걸의 저주라고 불렀다.

 그동안 영화사에서는 제작비 등의 이유로 육감적인 몸을 가진 신인배우들을 본드걸로 캐스팅했었다. 그래서 본드걸들의 연기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를 물색하여 캐스팅하고자 했다.

그래서 1998년 이런 저주에 대한 논란을 잠재우고자 연기력이 검증된 당대 프랑스 출신 최고의 여배우 <소피마르소>를 본드걸로 영입한다.(한참 책받침이나 코팅된 사진을 문방구에서 팔았던 기억이 난다.)

청순한 이미지로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받던 소피마르소를 <007 언리미티드>의 본드걸로 캐스팅 한 것이다. 영화는 대 성공이었다. 그래서 소피마르소에게 다음 작품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이렇게 본드걸의 저주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나 소피마르소도 본드걸의 저주를 피해가지 못했다. 다음으로 출연했던 영화들 모두 흥행에 참패하고 만 것이다. 

이제 누가 본드걸을 하려고 할까? 모두 기피하고 있던 찰나 할리베리가 찾아왔다. 그녀는 흑인 여배우로 2002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흑인 최초로 수상한 배우였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던 여배우가 찾아와 자신이 본드걸 역할을 잘해낼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그녀는 007시리즈 제 20탄 <어나더데이>에 출연하게 된다. 이 007 영화 역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이후 할리베리는 또 다른 대작 영화<엑스맨2>, <캣우먼> 등 2편에 단독 주인공으로 캐스팅 된다. 엑스맨이나 캣우먼은 대작으로 흥행에 실패할 수 없는 대작품이었다. 이렇게 저주는 풀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 모두 흥행 실패로 끝난다.

2005년 21번째 007 시리즈 영화 만들려고 하는 데 희망하는 여배우가 없다. 안젤리나 졸리 등 모든 여배우들이 본드걸의 저주란 이유로 출연 거부를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신인 에바 그린이라는 여배우가 맡게 된다. 하지만 에바 그린 역시 007 이후 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나 마땅한 흥행작 없이 주목받지 못하고 말핬다.

2015년 <007 스펙터>까지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에 출연한 본드걸은 저주가 있을지 아니면 깨트릴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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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오늘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탐방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요기를 하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제가 묵고 있던 숙소는 워터루 역 근처의 아파트로 템즈강을 건너서 약 30분정도 걸어가면 나오더라구요.
구글 지도를 켜고 천천히 영국 런던의 경관을 구경하며 걸어갔습니다. 걸어가는데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 조깅하며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조깅하는 사람들 대부분 운동복을 바르게 갖춰 입고 달리기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이 육상 종목에서 그래도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강국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더라구요.
템즈강의 웨스트민스터 다리를 지나가다 보니 공사중인 빅벤도 보이고 공원에는 처칠 등 여러 위인들의 동상들이 보였습니다. 동상들이 있는 조그만 공원 바로 앞에 드디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런던에 위치한 성공회 성당으로 역대 왕들의 대관식, 결혼식, 장례식 등이 열리는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원래는 카톨릭 성당으로 지어졌으나 종교 개혁기를 거쳐 성공회 성당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장례식과 그 아들인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이 열린 장소로도 유명하지요.
또 우리와는 맞지 않게 시신을 성당 내부에 안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당 곳곳에 여러 영국 왕들과 왕비, 과학자 등의 무덤이 있습니다. 시신을 자꾸 안치하다보니 실내가 조금 좁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상적인 이야기 중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1세의 무덤은 전해오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피의 메리1세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메리 1세입니다.)
잉글랜드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는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서로 경계하는 사이였습니다. 메리 1세는 결혼도 순탄하지 않았으며 급기야 반란군에게까지 패하여 폐위당하고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요. 하지만 경계의 눈초리를 하고 있던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1세를 칼라일 성에 감금하고 반역죄로 몰아 처형하였습니다. 그리고 영국 중부에 있는 피터버러 성당에 묻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식이 없는 상태로 죽자 메리의 아들 제임스1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피터버러 성당에 묻혀 있던 어머니 메리 1세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이장하여 엘리자베스 1세보다 훨씬 크고 아름답게 대리석으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이 사원의 아쉬운 점은 실내에서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원의 정문 바로 앞에서 우버를 부르면 10여분 내로 도착하니 참고하세요.

1592414. 임진왜란 발발로 조선땅은 아비규환으로 현장으로 변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정벌하러 갈 테니 조선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하며 우리나라를 침입하였다. 생전 처음보는 무기인 조총으로 생전 처음보는 무기를 들고 나타난 왜군부대는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조선을 손쉽게 유린하였다.

그 왜군부대 중 조총부대를 이끌던 사야가

그는 조선의 문화를 동경하여 처음부터 투항을 결심하였다고 그의 저서 모하당술회록에 적어 놓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아내와 딸을 볼모로 조선에 출병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어쩔 수 없이 출병한 사야가.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이런 불합리하고 의롭지 못한 전쟁을 찬성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선진 문화의 조선을 동경하였으며 기회를 틈타 조선에 귀화하리라 마음 먹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자신의 병사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조선인 모녀를 목격하게 된다.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아내와 딸을 생각하게 된다.

부산진을 함락한 다음 날 사야가는 조선군에게 귀화하고 싶다는 편지를 쓴다. 이렇게 사야가는 귀화하여 김충선이라는 새 이름을 하사받는다. 본은 김해김씨, 이름은 충성하고 어진마음이라는 충선을 하사 받게 된다.

조선에서는 이렇게 귀화한 병사들을 항복한 왜군이라고 하여 항왜라고 불렀다. 이런 항왜를 활용하여 일본의 사정을 파악하고 조총 등 무기 관련 기술을 습득하였다.

김충선이 된 사야가도 조선군에게 조총 사용법 등을 조선군에게 알려주어 조선 조총부대를 만들게 된다. 왜군들에게서 노획한 조총으로 훈련한 김충선의 조선군 조총부대는 울산성 전투에 참전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된다.

김충선은 그 후 1624년 이괄이 난, 1636년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화약제조와 조총기술 등을 전수하면서 조선의 명장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경상도 달성군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사야가는 조선이 꾸며낸 조작극이라고 주장한다하지만 1970년 작가 시바 료타로의 연구로 사야가는 김충선이라는 것을 밝혀 낸다그리고 사야가를 천하의 매국노이며 증오의 대상이라고 하였다일본에서도 아예 사라져버린 사야가의 가문이지만 한국과 일본의 후손들은 한국과 일본의 평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그리하여 해마다 달성군에 있는 달성한일우호관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방문하여 김충선 장군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모회당 술회록> - 김충선의 문집

-김충선 장군의 조선군 부임당시 이미 조선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고 그나마 들고 있는 창과 검의 훈련법마저 미숙한 상태였다.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킨 왜군에 환멸을 느낀다.

 

달성한일우호관 http://www.dskjfriend.kr/main

 -녹동서원(숭의당): 대구 달성, 모하당 김충선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

 -녹동사: 모하당 김충선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

  -김충선 장군 묘소: 녹동서원 뒷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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