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격진천뢰에 대하여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비격진천뢰 특별전이

8월 25일까지 열린다.

그럼 비격진천뢰는 무엇인가?

일종의 시한폭탄이다.

기록을 보면 임진왜란때

경주성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성안에

비격진천뢰를 쐈다.


왜놈들은 그것이 무언인지 신기하게 쳐다보고

만져보고 굴려도 봤다.

그때 꽝 소리와 함께 폭약이 터지니

왜놈들이 20여명 즉사했다고 한다.

그렇게 비격진천뢰를 앞세워서

경주성을 수복하였다고 한다.



비격진천뢰를 만든 사람은 이장손이다.

우리나라 최초 작렬식 시한폭탄이다.

목표 지점에 비격진천뢰를 쏴서 보내면

조금 있다가 꽝 터지는 신무기였다.

왜놈도 모르고, 명나라도 모르는

무기였기 때문에 살상 효과가 컸다.


비격진천뢰의 사용법은 다음과 같다.

-쏘기 전에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

-목표물에 쏜다. 목표물에 떨어진다.

-도화선이 다 타들어가면 뇌관에 불이 닿아

폭탄이 터진다.

-둥그런 폭탄 속에는 철편이 있어 적을 살상한다.



마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조리돌림, 멍석말이


<조리돌림>

마을에서 질서와 규범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으면 마을이 무질서 해 진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하여 마을의 질서를 지키고자 한다.

일단 마을 어른들끼리 회의를 하여 어떤 처벌을 할 것인지

결정을 한다.

어떤 처벌을 할 것인지 결정되었다면

규범을 어긴 사람의 등에 북을 단다.

마을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의 죄를 알리고,

농악대를 앞세워 마을을 돌게 한다.

그렇게 해서 죄를 지은 사람은

창피를 당하게 된다.


마을 주민들은 죄를 지은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가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심한 창피를 당하게 되어 다시는 

나쁜 행동을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마을 스스로 좋은 행동을 하도록 권장하고

나쁜 행동은 하지 않게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멍석말이>

덕석마리라고 불리우는 멍석말이는 주로

집안이나 동네에서 몹쓸 짓을 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방식이다.

멍석은 옛날식 돗자리이다.

짚을 엮어 커다란 깔개를 만들어 썼는데 곡식을 말릴 때나

사람들이 마당에 앉을 때 사용하던 것이다.


마을이나 집안에서 몹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마을회의, 문중회의를 통해 

몹쓸 짓을 한 사람을 멍석에 눕히고 둘둘 말아

매질을 하여 버릇을 고쳐주려고 하는 것이 멍석말이다.


마을이나 집안에서는 관가에 신고하는 대신에

멍석말이를 행했는데,

마을법(동리법), 문중법이 더 무섭다고 여기기도 했다.


또 다른 멍석말이의 의미는 장례를 치를 형편이 되지 못해

멍석에 시체를 둘둘 말아 산에 버리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5.18민주화운동 전두환 유혈진압 굿 아이디어라고 승인

5.18 민주화 운동의 유혈진압을 전두환이

승인했다는 문서가 공개되었다.

5.18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작전이 충정작전인데

보고서에 굿 아이디어라고 쓴 문건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광주 사람들을 죽였다.

죽인 시신은 소각했다는 정보 요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찌 저런 일이 있었는가 화가 너무 난다.


정보 요원들의 이야기는 대략 이러하다.

광주의 아들들은 군인들에게 잡힌다.

팬티 바람으로 손 머리 하여 트럭에 태워진다.

지하실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다.

그러다가 죽는다.

그러면 소각장에서 태워진다.

그러나 그 어미는 5.18만 되면 아들이 죽은지도 모르고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돌아오지 않을 아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모두 사면해 준다.


허탈한 이야기이다.

아니 자국민을 저렇게 많이 죽였다면 그에 응당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아직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시간이 하도 오래 지나서 모든 법적이 처벌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사를 깨끗하고 투명하게 규명하지 못하면

역사는 되풀이된다.

반드시 5.18의 진실은 묻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증거가 부족하다면,

꼼짝달싹 못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더 나왔으면 좋겠다.

시간이 흘러 죄를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광주학살의 책임자가 누구였고,

왜 그렇게 했는지 역사는 꼭 기억하고 싶어한다.





일본 어린 아이들에게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초등 교과서를 발표했다.

내년부터 일본 초등학생들은

이 교과서로 독도가 일본땅인데

한국이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다고 배우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잘못된 역사를 배운 어린이들이

한국을 혐오하게 되고,

나아가 한일 관계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다.

잊을만 하면 반복되는 일본의 억지 주장때문에 열이 받는다.


 

고대 때부터 왜구들이 우리나라 해안가를 침범하여

온갖 못된 행동을 한 것은 쏙 빼놓고

임진왜란, 러일전쟁, 태평양전쟁,

일본대지진 시 조선인 학살, 정신대와 징병 징용문제는

거의 가르치지 않는 일본의 행동이 매우 못마땅하다.

가뜩이나 요즘 일본과 관계도 좋지 않은데,

기름을 붙는 행위를 하여 더욱 나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무리 밉고 싫고 저주하고 싶은 나라이지만

경제 관계를 따져보면 어쩔 수 없이 협력해야 하는 나라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1위의 반도체 국가이지만

일본의 장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경제 협력을 하는 것이 매우 많아

일본 경제인들도 한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자라나는 일본 어린 학생들에게

잘못이 있는 과거를 제대로 가르쳐 주고,

반성하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일본 지식인들도 부끄러운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의견을 모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역사책에 씌여져 있고,

일본 역사책에도 한국땅이라고 적혀 있다고 하지 않은가?

더이상 독도 문제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지 않았으면 한다.

정말 가까이 하기 싫은 나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협력해야 하는 현실이 아쉽다.

윤봉길 기념관을 찾아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찾았다.

먼저 묵념을 하고 기념관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윤봉길 의사의 나라 사랑 정신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윤봉길은 1908년 예산에서 태어났다. 

1918년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3.1운동의 영향으로

더 이상의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덕산보통학교를 자퇴했다.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농촌 계몽운동에도 힘썼다.

그리고 이흑룡과의 만남에서

무장 독립항쟁의 중요성을 깨닫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남긴 말이 장부출가생불환이었다.

사나이 대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섰을 때에는

살아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이때 그의 나이가 23세에 불과했다.


중국으로 건너가 만난 사람이 김구선생이다.

김구 선생과 모의한 것은 홍커우 의거이다.


운명의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일왕 생일 축하와

전승 기념 행사가 있던 날

윤봉길 의사는 행사장에 잠입하였다.

그리고 꺼내 든 것이 물통 폭탄이었다.

이날 의거로 단상에 있던 총사령관

시리카와 요시노리와

상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테이지를 죽이고

여러 명에게 중상을 입히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중국 국민당 장제스는 

"중국 100만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라고 감탄을 하였다.


이후 중국 국민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놈에게 잡힌 윤봉길 의사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결국 총살형으로 순국하셨다.


조선의 독립을 최고의 의미를 부여했던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삶이 묻어나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예산 충의사) 탐방이었다.


블랙리스트 어원과 뜻을 알아보자.

블랙리스트 뜻과 어원

정치권에서 블랙리스트가

있느냐 없느냐에 한동안 말들이 많았다.

특히 예술계에 블랙리스트가

있었다고 하여 큰 파장이 있었다.

그럼 도대체 블랙리스트의 뜻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유래된 말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Black - 검은, 사악한, 나쁜

List - 명단

단순하게 생각하면

위험한 인물들의 명단이라고 할 수 있다.

집권당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권력에 도전하여

집중적으로 감시가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블랙리스트는 언제 쓰였는지

어원을 알아보겠다.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은 1642년~1651년 청교도 혁명에서

왕당파와 의회파의 대립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왕당파를 몰아내고 찰스 1세도

처형한 후 공화정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왕당파들은 찰스 2세를 중심으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크롬웰과 영국 내전을 벌였다.

하지만 크롬웰의 승리로 영국 내전은 끝나고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도망을 간다.


크롬웰은 호국경이 되어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왕당파의 반란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그는 군대를 정비하고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러다가 병으로 죽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이 되었으나

멍크가 1660년 왕정을 복고하고,

프랑스에서 돌아온 찰스 2세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왕위에 오른 찰스 2세는

아버지 찰스 1세의 사형 판결에

서명한 관련자들의 명단을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명단에 검은색 표지를 사용하였다.

그게 바로 블랙리스트이다.


이 명단에 오른 사람 59명 중

30명이 사형당하고,

25명은 종신형을 받았다.

죽은 크롬웰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시신이지만 끌려 나와

부관참시 당하고, 사원에 내걸렸다.


찰스 2세가 작성했던

피의 정치보복을 위한 명단에

검은색 표지를 사용한 것이 블랙리스트의 어원이다.


어째 블랙리스트는 조선시대

한명회가 작성했던 살생부와 비슷한 것 같다.


화이트리스트라는 말도 있다.

이는 블랙리스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의 명단,

살려야 하는 명단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우리들에게 필요한 사람인 것이다.


제1차 왕자의 난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나이는 당시로 보면 고령이니 세자를 세워야 했습니다.

이성계의 부인은 신의왕후와 신덕왕후가 있었습니다. 

신의왕후 소생은

이방우(진안대군),

이방과(영안대군),

이방의(익안대군),

이방간(회안대군),

이방원(정안대군),

이방연(덕안대군)이 있고,


신덕왕후 소생은

이방번(무안대군),

이방석(의안대군)이 있었습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은 이방원이 제쳐두고

권력과 거리가 먼 이방석을 세자로 앉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 정도전이 계획한 신권 중심의 왕도정치를 펼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자는 정도전의 주장대로 의안대군으로 결정됩니다.

그리고 왕족과 신하들이 거느린 군인들을 국가의 군대로 만들자고 주장합니다.

사병들이 있으면 언제라도 왕에게 반역하는 무리가 생길 것이고,

현재 국방력이 약해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방원과 같은 왕족의 군대를 혁파하여 힘을 빼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이에 이방원은 엄청난 분노를 느낍니다.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찬스가 찾아옵니다.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이성계도 병으로 몸져 눕고 맙니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을 처치하고,

궁으로 들어가 신덕왕후 소생인 이방번과 세자 이방석을 죽입니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입니다.

세자책봉과 왕위계승권 문제로 정도전과 이방번, 방석 형제들을 죽인 사건입니다.


나중에 이 사건을 알게 된 태조 이성계는 불같이 화를 내고

왕위를 내려놓고 함흥땅으로 가버립니다.


그럼 이방원이 왕위에 올랐을까요?

아닙니다.

첫째형 방우는 이미 죽었으므로 둘째형 방과가 왕위에 오릅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은

오로지 장자 세습을 지키려는 것이지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표면적으로나마 천명한 것이지요.


이방원이 그렇게 노력하여 조선 개국을 도왔는데,

왕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배다른 형제에게 돌아가게 되어

화가 났음은 이해가 됩니다.

그 정도로 권력 앞에서는 형제도 부모도 없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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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자기 관리가 철저했던 임금을 꼽으라면 영조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무수리인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탕평책을 펼치며

인재를 고루 등용했던 왕인 영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저는 영조하면 사도세자가 떠오릅니다.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넣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한 영조.

어떻게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죽일 수 있을까?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영조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최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숙종은 장희빈 사이에서 경종을 두었는데 경종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습니다.

경종을 밀었던 소론 세력들은 연잉군(영조)를 지지하던 노론 세력들과 정치적으로 티격태격하며

붕당정치를 하였습니다.

노론들은 경종이 후사가 없으니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라고 하고, 

더 나아가 대리청정 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노론은 장희빈이 사사될 때 찬성했던 사람들로 구성된 정치집단입니다. 

그러니 경종이 왕위에 있으면 자신들의 안위가 보장되지 않으므로,

연잉군을 지지하여 어떻게 해서든 왕위에 올려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경종은 노론을 역모로 다스려도 시원치 않을 사건이지만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고, 대리청정 시키고, 

또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했지요.

영조는 이렇게 노론과 소론들의 싸움 틈바구니 속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며,

붕당정치의 폐해를 몸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자 탕평책을 실시한 것입니다.

즉 어느 당파든 능력과 재능에 맞는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의 발전을 도모한 것입니다.

영조의 이런 노력으로 정치가 빠르게 안정되어 갑니다.

또한 균역법을 실시하여 군포를 2포에서 1포로 줄여줍니다. 

군포란 군대를 안가는 대신 세금으로 옷감을 내던 것을 말합니다.

그동안 지방 관리들이 군포를 많이 걷거나, 

군포를 내기 어려워 도망간 이웃의 군포까지 내라고 했지요.

그런데 영조임금께서 군포를 1필로 내라고 했으니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되어 갑니다.

또 모내기 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이 증가하여

쌀을 많이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영조는 첫 번째 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효장세자인데 안타깝게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러다가 영조 나이 42세에 드디어 아들을 보았습니다.

당시 42세이면 노인층에 속하는 나이였으므로, 

아주 늦게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뛸 듯이 기뻐하며 그 아들에게 온갖 정성을 쏟습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아버지 영조를 흐뭇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커가면서 공부보다는 무예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영조는 세자가 무예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것에 마땅찮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붕당 정치 속에서 임금이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세자가 공부를 멀리하고 있으니,

아버지 영조의 불만과 실망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그러다가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켜 봅니다. 

대리청정을 하는 사도세자는 위엄있게 정치를 잘 합니다.

사도세자가 노론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치를 하고 있는 모습에 슬슬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대리청정은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정치를 잘하면 노론의 견제를 받고, 정치를 못하면 아버지 영조의 질책이 뒤따랐으니까요.

아버지 영조는 계속 사도세자의 잘못을 꾸짖습니다.

그러자 세자는 영조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마음의 병이 생긴 것입니다.

아버지 문안을 하러 가는 것이 너무 싫어집니다.

그런데 어느날 너무 아파서 문안을 안가니 너무 좋은 겁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계속 꾀병이나 다른 이유를 대며 문안을 가지 않습니다.

상궁들이 입을 입혀 주면 옷을 벗어버립니다. 그 옷을 입고 영조에게 문안을 가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상궁이나 내시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관서지방 기행 등 세자의 비행을 나중에는 영조도 알게 됩니다.

나중에는 친어머니인 영빈이씨가 사도세자를 벌주어야 한다고 영조에게 주청합니다.

사도세자가 동궁에서 칼을 들고 영조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영조에게 전한 것입니다.

세자의 비리를 고발한 나경언의 고변도 영조를 분노하게 만듭니다.

이미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도 똑똑하고, 사도세자는 정신질환 등으로 가망없다고 생각한

영조는 사도세자 스스로 자결하라고 합니다.

말을 따르지 않자 뒤주에 가둬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듭니다.

 영조가 스스로 아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정황이 너무 안타깝고,

 너무 아픈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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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건국과정


원이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을 즈음, 한족이었던 주원장이 난징을 수도로 하여 명을 건국하였습니다.

고려는 권문세족들의 수탈과 횡포, 홍건적과 왜구들의 침입과 노략질 등으로 민심은 극도로 혼란해졌습니다.

이에 신진사대부들이 등장하여 권문세족을 비판하고, 최영과 이성계 등은 홍건적과 왜구들을 무찌르며 신흥무인세력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명이 점점 힘을 키워가고 있을 즈음 고려 조정에 쌍성총관부가 있던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였습니다.

고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최영은 즉시 반발하여 명을 정벌해야 한다고 하고, 이성계는 4불가론을 말하며 명나라를 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총사령관은 최영이므로 상관의 명에 의해 이성계는 출병하게 됩니다.

이성계 군대가 드디어 도착한 곳은 압록강 하구 지역의 위화도.

때마침 홍수가 있어 압록강이 물이 불어 14일간 진군을 하지 못하고 위화도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좌군 도통사인 조민수와 협의 끝에 회군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리고 위화도에서 회군(1388년)하여 개경에 있던 우왕과 최영을 처리하고, 정치 군사적인 실권을 장악합니다.(우왕은 강화도에 유배, 최영은 유배 후 처형, 우왕 아들인 창왕이 등극)

토지제도도 개혁하여 경기 일대의 토지를 관료들에게 나눠 주고, 수조권만 갖게 합니다.

즉 토지는 나라가 소유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세금만 거둘 수 있는 권리만 준 것입니다. 

과전법 시행으로 넓은 토지를 소유했던 권문세족들은 더욱 위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고려를 개혁하는 방향에 온건파와 급진파가 대립합니다.

정몽주, 이색은 고려 왕조를 유지한 채 점진적으로 개혁하자고 주장하고

조준, 정도전은 고려 왕조를 없애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자고 주장합니다.

이런 대립에서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고 온건 개화파를 제거합니다.

그리고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합니다.

이로써 조선왕조 오백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성계의 4불가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순 없다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면 홍수 및 전염병 위험이 있다.

-명을 정벌하러 갔을 때 왜구가 침입해 올 수 있다.

-장마철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진다.


<조선의 건국과정>

-권문세족의 횡포,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인세력의 등장

-위화도에서 회군

-최영, 우왕 제거

-온건개화파 제거

-토지제도 개혁(과전법)

-조선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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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7년전쟁 중 명나라와 조선이 일본과 싸우는 도중

만주 지방에는 후금이 점차 세력을 키워갑니다.

그러면서 후금은 힘을 키워가며 명을 위협합니다.

위기를 느낀 명은 조선에게 원병을 요청합니다.

임진왜란 때 우리가 너희 조선을 도와주었으니 이번에는 우리를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임금인 광해군은 실리를 추구하는 왕이었습니다.

나라의 힘은 없는데 명나라 편에 설 수도 없고, 후금에 설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서 중립외교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당시 일부의 정치 세력들은 참으로 의리 없는 짓이라고 하며 반정을 일으킵니다.

그게 바로 1623년에 서인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인조반정입니다.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조선을 바라보니, 

명나라와의 명분만 고집하는 서인정권이 들어서 있는 것을 곱게 볼리 없었습니다.

"어라! 우리를 반대하는 것들이 왕을 해먹고, 나라를 다스리고 있네!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손 좀 봐줘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1636년 12월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한 전쟁이 병자호란입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그동안 청군은 조선땅을 마음껏 유린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청군의 공격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치욕적인 항복을 합니다.

그리고 청의 황제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세번 절을 하는데 절할 때마다 세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의 예를 올립니다.


인조는 정축화약의 항복 조건으로 내세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게 됩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머물면서 아담 샬 신부를 만나 서양문물을 접하게 됩니다.

놀라운 서양 문물을 보며 소현세자는 조선도 청나라처럼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9년간의 볼모 생활이 끝나고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와서는 인조에게 청의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청나라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인조는 꿈에서도 잊지 못할 치욕을 청나라에게 당했는데 

그런 나라와 화친해야 한다는 소현 세자의 말을 듣고 슬슬 분노에 가까운 화를 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자 인조는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서삼릉 소경원에 안장시킵니다. 


세자가 죽었으니 다음 세자는 당연히 세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조는 소현세자 후임으로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올립니다.

그리고 인조는 세자빈 강씨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아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친명배금이라는 나라의 정책을 잘못 선택하여 나라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백성들을 참혹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조선의 희망이었던 소현세자와 가족들까지 무참히 죽인 인조의 행동이 정말 아쉬운 대목입니다.

만약 소현세자가 무사히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의 개화는 일찍 되어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들도 편안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소현세자처럼 혜안을 지닌 사람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국가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을 띠었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피가 나오므로, 검은 멱목(천)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소현세자 죽은 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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