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독일의 과거사 반성

일본은 우리 나라를 36년간 괴롭히고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서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등

많은 독립투사들이

일제에 항거하다 돌아가셨다.


식민지 말기에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서

징용, 징병, 정신대 등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진주만 기습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의 원자폭탄 두 방을 맞고

무조건 항복을 한다.

이로서 조선을 괴롭혔던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가해국에서

하루 아침에 원폭 피해국으로

포장된다.


소련과 미국의 냉전 체제에서

일본은 슬그머니 자유 진영 체제에

편입되면서 전범 처리나 과거사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일은 유대인을 학살하고

유럽을 전쟁의 포연으로 만들었으나

전범을 처리하고,

사과와 반성이 이루어졌다.


이게 일본과 독일의 과거사 시점이다.

아직도 일본은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전쟁을 미화하고 있다.


징용이나 징병도 조선인들이

조선에는 일자리가 없어

돈벌러 온 것 아니냐고 한다.

정신대 또한 스스로 자원해서

하지 않았느냐고 억지를 부린다.

아직도 일본 지도자들은

일본 전범들을 모아 놓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나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면

반드시 사과와 반성을 해야 한다.

그게 올바른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그게 국가라면

더욱 더 사과와 반성을 해야 한다.


똑같이 잘못을 저지른 독일을 보고

일본도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 잡고 

주변국에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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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두와 페스트 생물학전

우리들이 마마라고 불리는 천연두

중남미 아메리카의 제국을 무너뜨린 질병이다.

천연두에 걸리면 2주 정도의 잠복기를 거쳐

발열, 두통, 요통이 일어나고 피부 질환이 발생한다.

피부에 수포가 생기다가

폐혈증, 폐렴 등이 발생하여 사망률이 높은 질병이다.


1519년 서유럽의 대항해시대

스페인의 코르테스 부대는 아스텍 제국에 도착했다.

아스텍인들은 코르테스의 외모가

자신들이 믿는 구세주 <케찰코아틀>과 비슷하여

신처럼 떠받들었다.


그런데 코르테스 부대와 접하면서

아스텍 사람들은 하나 둘씩 죽어나갔다.

바로 그들이 가져온 것은 천연두라는 처음 보는 질병이었다.

유럽인들은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스텍인들은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고작해야 300여명의 코르테스 부대가

1521년 아스텍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인구의 절반 이상이 천연두로 사망하였기 때문이었다.

아스텍인들이 원인 모르게 죽어나가자,

이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아스텍 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라틴아메리카로 이동하였는데,

이에 따라 천연두 바이러스도 함께 퍼져 나갔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의

잉카문명, 마야문명, 아스텍 문명과 같은

많은 제국이 쓰러져 갔다.

코르테스가 의도적으로 천연두 균을

라틴아메리카에 퍼트린 것은 아니다.


영국인들은 북아메리카를 먹기 위해

고의적으로 천연두균이 묻은 담요나 옷을

인디오들에게 선물하였다.

그래서 인디오들은 천연두에 감염되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몽골인들이 유럽 원정 시 죽은 시체를 성 안에 던져서,

페스트 균이 성안으로 퍼져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던 페스트. 

이로 인해 유럽 인구의 1/3이 죽어 나갔던 질병이다.


중앙아시아에서는 풍토병이었지만 유럽에서는 생전 처음 접하는

병원균과 기근으로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전쟁에 사용한 천연두와 페스트는

아마 생물학전의 시초가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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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의 유래


BC 496년 오왕 합려는 월왕 구천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오왕 합려는 간신히 도망갔으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고 말았다.


죽을 때 태자 부차에게 나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그때부터 태자 부차는 아버지의 유언을 가슴 깊이 새기며,

편안한 잠자리가 아닌 거친 장작더미에서

잠을 자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오왕 부차가 복수를 위해 한을 품고 있다는 것을

월왕 구천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정벌하러 갔다.

하지만 그때는 오왕 부차가 군사력을 키우고,

치밀한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월왕 구천은 패퇴하고 말았다.


월왕 구천은 대부분의 영토를 오나라에게 주고,

신하가 된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월나라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제 월왕 구천은 쓸개를 늘 옆에 두고

맛을 보며 복수할 날만 기다렸다.

밥도 거친 밥만 먹고,

충신을 곁에 두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였다.

특히 범려의 말을 잘 듣고 복수를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오왕 부차가 미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서시란 여인을 미인계로 유혹하였다.

오왕 부차는 서시를 매우 총애하게 되고,

월나라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였다.

서시에 빠져 정사를 잘 돌보지 않자, 오자서가 간언을 하였다.

서시를 멀리하고 국정을 살피라는 수차례 간언을 하자

오왕은 오자서를 차츰 그를 멀리하게 된다.

오자서를 오나라의 운명이 바람앞에 등불이라 여기고,

자신의 아들을 제나라로 보낸다.

그런데 그와 사이가 나빴던 백비라는 사람이 모함을 하여

오왕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결하라고 명검을 보낸다.


오자서는 한탄하며 죽는데, 

그때 자신의 두 눈을 빼서 동문에 걸어달 라고 하였다.

오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오왕 부차는 이 소식에 격노하여

오자서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국력을 계속 키우던 월나라 구천은

오왕 부차가 제후들을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급습하였다. 

그동안 길러온 군사력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공격으로 오나라의 항복을 받아냈다.


다시 월왕 구천은 지난날의 치욕을 씻은 것이다.


오왕 부차가 자신을 살려둔 것처럼,

구천은 오왕 부차를 살려두고

귀양을 보내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국정을 게을리 한 것을 후회하며 자결하고 말았다.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

와신상담의 유래이다.


와신 - 臥薪 - 통나무, 장작나무 위에 눕다.

상담 - 嘗膽 - 쓸개의 맛을 보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당연히

사이가 좋지 않는 나라였다.

그래서 지금도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을 말할 때

오월 이라고 말을 한다.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같은 일을 하게 될 때는

<오월동주>라고 한다.

즉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끼지 같은 배,

같은 장소에 함께 있을 때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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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왜 돼지고기를 금할까?

돼지고기 먹지 않는 이유

이슬람 사회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먹지 말라고 그들의 경전인

쿠란에 적혀 있기 때문이다.

맛있는 삼겹살과 영양분이 풍부한 돼지고기,

기르기도 쉬운 돼지고기를 왜 먹지 말라고 했을까?


이유를 찾으려면 그들의 종교 발상지가

사막 지역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막지역 유목민들은 가축 사육의 주된 이유가

고기와 우유의 생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돼지의 우유는 사람이 먹지 못한다.

사막에서 필수품인 유제품을 생산하지 못하고,

돼지는 가죽으로도 사용하지 못한다.


사람처럼 잡식 동물이라

사람이 먹는 것을 돼지가 먹게 된다.

먹고 난 배설물은 연료로도 사용할 수가 없다.


유목생활을 하려면 이동 생활을 해야 하는데,

짐을 돼지 등에 얹고 나를 수도 없다.

특히 다리가 짧아 이동하는데 도움이 안된다.


돼지고기는 사막의 자연 상태에서

쉽게 부패하고, 건조 시키기도 좋지 않다.

이렇게 이슬람교에서는

돼지는 더럽고 불결하고 쓸모없는 동물로 인식된 것이다.

그래서 쿠란에는 돼지 사육이

매우 소모적이라고 예언적으로 표현하였다.


만약 이슬람교가 한국에서 발생되었다면

영양가 있는 돼지고기를 많이 먹으라고 했을 것이다.


이처럼 종교도 어디에서 탄생 하였느냐에 따라

그 지역의 생활과 문화가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종교를 이해하는 것은

탄생한 종교의 지역 문화를

이해하게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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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이야기

중국에서 여자로 권력을 누리거나 황제까지 오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측천무후와 서태후입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아들까지 몰아내고 황제에 오른 입지전적의 여걸입니다.

하지만 당나라를 더욱 부강하게 만드는 기틀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서태후는 그렇지 못하고 악녀의 이미지가 더욱 강합니다.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출세의 꿈을 안고 궁녀로 들어갑니다.

야망까지 있어 함풍제를 모시는 환관들의 환심을 사서

드디어 함풍제의 눈에 들게 됩니다.


함풍제의 혈육까지 낳아 의귀비로 봉해집니다.

당시 청나라는 나라 안팎으로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대내적으로 태평천국의 난,

대외적으로는 영국과 프랑스의 침입으로 나라가 힘들었습니다.

서태후는 함풍제 주변에서 정치를 관여하기도 하였는데,

그만 함풍제가 병사하고 맙니다.

함풍제가 죽고 난 다음 서태후가 낳은 아들

이외에는 후계자로 마땅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5살밖에 안된 동치제가 황제로 즉위합니다.

 5살밖에 안된 황제이므로 황제의 어머니인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서태후의 수렴청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서태후는 동태후에게 도움을 청하여 둘이 함께 수렴청정을 합니다.

공동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었으나

당시 동태후는 글을 잘 읽지 못하고,

정치에 뜻이 없어 서태후가 정치를 이끌어 가게 됩니다.

(자금성 동쪽에 살아 동태후, 서쪽에 살아 서태후라는 명칭이 붙여짐)


함풍제 동생인 공친왕과 연대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서태후는

청나라의 자강운동에 힘을 쏟아 태평천국의 난도 잔입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동치제는 친엄마인 서태후보다 동태후를 더 따랐고,

황후 간택도 동태후가 추천한 인물을 선택하였다.

이에 서태후는 사치로 스트레스를 풀었고,

수천벌의 옷, 수많은 보석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서태후가 분수에 맞지 않게 생활하자

동태후가 서태후에게 함풍제의 유서

-만약 서태후가 분수를 지키지 않으면 죽여라-를 보여줍니다.

이에 서태후는 깜짝 놀라 납작 업드립니다.

어느날 동태후가 병이나서 서태후는 지극정성으로 간병합니다.

이에 감동한 동태후는 함풍제의 유서를 소각합니다.


유서가 없어지니 서태후는 이제 동태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외간 남자들을 불러다 정을 통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동치제에게도 정치에 관심없도록 향락의 세계로 인도해 줍니다.

결국 동치제는 향락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성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다음 황위는 함풍제의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4살짜리 광서제가 즉위합니다.

광서제는 커감에 따라 부패해가는 청나라를 보며 걱정을 하지만

서태후의 권력이 너무 막강해 하고 싶은 일을 못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입지를 확립하기 위해 청일 전쟁을 일으키지만,

서태후가 그 유명한 이화원을 건립하는데 전쟁자금을 빼돌립니다.

(이화원이 지금은 관광지로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결국 일본의 승리로 청일전쟁은 끝이 납니다.

광서제가 변법자강운동을 하려고 하지만

그를 유폐시키고 광서제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죽입니다.


누구도 서태후를 제지할 수 없는 상황이고, 그녀는 사치와 향락은 점점 커져만 갑니다.

반면 청나라는 더욱 쇠약해져 가고 몰락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녀 역시 늙고 쇠약해진 가운데 생일잔치에서

너무 많은 음식을 먹고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유언을 남깁니다.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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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최악의 판단미스 진주만 공습

세계 제 2차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원래 서로 전쟁을 하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독일이 프랑스를 함락시킨 틈을 타서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출합니다. 

"일본은 아시아의 독립을 지키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권을 만든다." 

라고 주장하며 침략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러자 이곳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원유 수송을 차단하고 경제적 제재를 취합니다.

 그러자 일본은 미국과의 우월한 협상을 하기 위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습합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전함 5척이 파괴, 200여대 항공기 파괴, 2,000여명의 사망 등 

전술적, 인적, 물적인 피해를 많이 봅니다.

 진주만을 무력화 시킨 후 일본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무혈입성 하다시피 점령합니다.

 

일본은 일본이 내건 평화협정을 미국이 따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섬 지역의 지배권을 달라고 요구했지요.

협상은 커녕 많은 피해를 본 미국은 격분하게 되고, 

그 동안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참전을 선언합니다.


이후 산호해 전투와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승리하여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 패퇴하고 맙니다.

가미카제 특공대 등을 앞세운 일본 군부는미국에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했는데,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최후의 방법으로

인류 최초로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먹입니다.


8월 15일 원자폭탄의 위력을 본 일본 국왕은

 무조건 항복한다는 발표를 하며 일본이 패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지 말고, 

서희의 외교담판처럼 미국과 외교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배제한 일본은 너무나 큰 피해를 보고 말았습니다.

지도층의 오판이 일반 국민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준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하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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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 대표팀의 선전으로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관계가 매우 긴밀해졌다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전투병을 파병한 우리나라는 서로 죽고 죽이는 전투를 경험하였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파병은 주한미국을 빼내 베트남전에 파병시키려고 하는 미국의 의도에 박정희 정부는 우리들이 전투병을 파병할테니 주한미군을 빼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투병 파병에 따른 우리나라의 경제적 원조를 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약 17년전에 한국전쟁을 경험한 국가로 공산주의와 싸워본 경험이 있습니다. 채명신 사령관을 중심으로 용맹스럽게 전투를 하여 베트콩들을 무찔렀습니다.

 공개된 호치민의 명령에는

 "한국군을 만나면 전투를 하지 말고 무조건 피하라. 특히 맹호부대를 만나면 무조건 작전 취소하고 철수하여 병력과 군사 장비를 보호하라"

 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로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또 엄청난 포탄을 쏘고 수많은 전사자를 냈음에도 프랑스, 미국, 월남군이 베트콩 요새 탈환을 실패하였는데, 한국의 해병대는 단 두 시간만에 점령해 버렸다는 이야기는 신화에 가깝습니다. 용맹스러운 해병대 군가가 생각나는군요.(그래서 해병대 캠프를 보내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전술의 차이라고 전해집니다.

 우리나라 군대는 베트콩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즉각 여러 방향에서 사격을 가하여 베트콩이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군들은 뒤로 물러나 포병에게 포 사격을 요청하거나 공중 폭격을 요구합니다. 그런다음 보병이 공격을 해봤자 그때는 이미 베트콩이 도망간 상태였습니다.

 베트콩들이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을 해도 한국군은 즉시 반격, 미군은 일보 후퇴하여 포격 요청을 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베트콩들도 섣불리 한국군을 공격하지 못하고, 한국군과 싸우는 것을 꺼리게 됩니다. 베트남 주민들은 한국군이 주둔한 곳이 오히려 더 안전하다고 하여 한국군 주둔지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옛날 임진왜란 시 이순신 주둔지가 안전하다고 하여 백성들이 몰려들었던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됩니다.

 베트콩을 무찌르는 것과 함께 베트남 주민들을 위한 대민지원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특히 맹호부대가 건기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고보이 댐을 건설해서 베트남의 2모작 농사를 3모작 농사가 가능하도록 대민지원을 하였습니다.

  17년전 한국은 공산군과 싸우며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그 정신을 이어서 베트남에서도 공산주의와 열심히 싸운 대한민국 국군들에 대해 전 세계 언론들은 믿을 수 없는 전과라고 하며 대서특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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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여성들은 그 더운 나라에서 얼굴을 가리거나 머리를 가리는 두건을 써야 합니다. 

그게 종교적 신념이라고 하나 여름에 얼마나 땀이 많이 찰까?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슬람 여성들은 히잡을 쓰는 것을 당연시 합니다.

이슬람 코란에서는 여성들이 남성을 유혹할 만한 신체부위를 드러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슬람 국가마다 약간씩 다르게 여성들의 옷차림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럼 이슬람 사람들이 착용하는 두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1. 부르카

-이건 진짜 인천공항에서 부르카를 한 여성을 봤는데 정말 덥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꼬마아이는 무서워서 뒷걸음질 치기도 하더라구요.

-머리부터 발목까지 모두 덮는 이슬람 의상인데 주로 아프카니스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눈을 앞을 봐야 하니까 이 부분만 모기장 같은 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걸 종교적 신념으로 봐야 되겠지만 그래도 답답한 복장인 것 어쩔 수 없네요.


2. 니캅

-부르카처럼 온 몸을 완전히 가립니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부르카는 눈 주위를 모기장 같은 망사로 가리지만 니캅은 그렇지 않고 눈만 노출시킵니다.


3. 차도르(아바야)

-얼굴을 제외한 모든 전신을 가리는 이슬람식 복장입니다.

-주로 검은색인데 양장을 입은 후 차도르를 걸칩니다.

-즉 얼굴만 내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으로 가립니다.


4. 히잡

-머리와 목 등을 가리기 위해 씁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나마 부르카, 니캅, 차도르보다 좀더 편리할 것 같습니다.

-아랍어로 가리다의 뜻입니다.

-코란에 언급되었으므로 역사가 오래된 전통 이슬람 복장입니다.


5. 터번

-남자가 착용하던 머리 둘레에 감는 천


6. 카피아


-케피에, 카피에라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남자들이 천을 머리에 쓰고 아갈이라는 테 모양의 머리띠를 눌러 씁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남자 왕족들이 뉴스에 나올 때 많이 볼수 있는 복장 형태입니다.


프랑스에서는 공공장소에서 부르카를 착용하면 벌금을 부과합니다.

부르카 금지법이 2011년부터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부르키니(부르카와 비키니의 합성어)는 이슬람 여성들을 위한 전신 수영복인데

이것도 프랑스 몇몇 해수욕장에서는 부르키니 착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또 사람과 만나는데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부르카를 금지한다고 하지만 

아마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도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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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문명 메소포타미아 지역,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최초로 문명을 발전 시킨 사람들은 수메르인들입니다. 이들이 발달시킨 문명이 바로 수메르 문명입니다. 수메르 문명은 이집트 문명보다 조금 앞선 문명이라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수메르 문명이 시작된 시기는 모릅니다.

기원전 5천년 경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수렵 채집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밀 농사법을 터득하여 조금씩 정착생활을 하면서 기원전 4천년경 부터는 이 지역에 도시들이 출현합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이상기후가 많아 수메르인들은 종교에 의지하게 됩니다. 수메르 종교에 나오는 신 중 아누나키를 묘사한 조각이 있습니다.

아누나키 전설을 이렇습니다. 원래 지구에는 인간들이 없었는데 아누나키라는 외계에서 온 사람들이 비행체를 타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누나키를 묘사한 조각을 보면 우주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외계인들이 이 지역에 왜 내려왔을까요? 그건 금을 채굴하러 왔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외계인들이 직접 금을 채굴하려면 귀찮고 힘들어서 그걸 대신할 것을 그게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수메르 문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수도시설이나 바퀴 등도 수메르인들이 제일 먼저 발견하여 사용했다고 합니다.

특히 인간의 배설물을 처리하기 위한 하수도 시설은 그 당시 사회에서는 획기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 수레바퀴가 다닐 수 있도록 도로 시설을 잘 정비하였습니다.

수메르인들이 집은 점토로 만든 벽돌집에 살았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석재가 별로 없었으므로 벽돌집을 지었으며 그 벽돌을 이용하어 수로시설까지 만들었던 것입니다.

 수메르인들은 문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쐐기 모양의 문자로 설형문자입니다. 쐐기문자를 점토판에 기록하여 현재 해독이 되어 수메르 문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유물들입니다.

 여기서 쐐기란 나무나 철을 비스듬하게 만들어서 문틈에 괴어 놓는 빗면처럼 생긴 물건입니다. 또는 물건 사이를 벌릴 때 쓰이는 납작하고 뾰족한 도구를 말합니다. 쐐기문자라고 하는 이유는 글자의 모양이 쐐기처럼 생겼다 하여 쐐기문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메르인들은 우르남무 법전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법이 존재하는 문명적인 사회에서 살아갔습니다. 이는 함무라비법전보다 약 250~300년 앞선 법입니다. 우르남무 법전은 점토판에 수십가지 법전을 새겨 놓았습니다. 

 하루를 시와 분으로 나눈 최초의 문명으로 60진법이 발달하였습니다. 수메르 최고의 신인 안의 고유숫자였기에 60을 중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수학을 발달시켜 수메르 문명은 과학과 천문학까지도 발달하여 건축물에도 적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건축물이 유명한 지구라트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피라미드보다 조금 작지만 정교하고, 수학적 원리가 잘 적용된 건축물입니다. 종교적 건축물로 현재 약 25개의 지구라트가 발견되었습니다. 내부는 진흙으로 채우고 외부는 점토벽돌로 정교하게 쌓아 만들었습니다.


수메르에는 유명한 인물 두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인물이 길가메쉬입니다. 그는 우르크 왕이었고 힘도 장사였으나 백성들의 평판은 좋지 않았습니다. 우르크 백성들이 길가메쉬에 대한 불만이 크자 여신이 엔키두라는 또 다른 장사를 만들어 냅니다. 엔키두는 뿔달린 괴물입니다. 엔키두는 길가메쉬에게 도전했으나 역부족으로 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둘이 싸움을 끝내고 화해하여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둘은 세상 모험을 떠납니다.

이 모험을 통해 그들은 악당들을 혼내주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 모험 중에 엔키두가 죽습니다. 길가메쉬는 매우 슬퍼하며 영원한 삶을 찾기 위한 모험을 떠납니다. 여기저기 모험하다가 불로초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우트나피쉬팀이란 노인을 만납니다.

우트나피쉬팀은 삼 백살 정도의 노인으로 신들이 이 땅에 거대한 홍수를 있을것이라고 예언하여 광주리를 만들어 가족들과 홍수를 피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우트나피쉬팀은 자기 집 앞 호수 밑에 불로초가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길가메쉬는 어렵사리 불로초를 구해 나왔으나 그걸 뱀이 훔쳐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것도 이브의 선악과에 나오는 뱀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길가메쉬는 불로초를 뱀에게 빼앗기고 슬프게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다음은 사르곤이란 인물입니다.

사르곤은 아카드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여사제(여자 제사장)이었는데 원래 여사제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몰래 사르곤을 갈대바구니에 넣어 강물에 떠내려 보냈습니다. 한 정원사에게 발견되어 그가 데려다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왕의 눈에 띄어 왕의 시종이 됩니다. 그리고 많은 전과를 거둔 후 사르곤이 키시의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당시 최강의 도시였던 우르크와 전쟁하여 승리를 합니다. 이후 계속적인 정복활동으로 수메르 지역을 통일하여 아카드 제국을 건설합니다. 

이상으로 수메르인들이 남긴 점토판을 해독하여 알게 된 이야기와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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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도자 중 가장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인 모택동(마오쩌둥).

그가 벌인 작전 중 참새 박멸 작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1958년부터 60년까지 중국은 최악의 흉년으로 4천여만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흉년이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니 그건 바로 참새들 때문이었습니다.

주석에 오른 모택동은 식량 증산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현지 시찰도 하였습니다.

1958년 현지 시찰하던 모택동은 수확기에 접어든 벼를 참새들이 쪼아 먹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참새들 때문에 농사가 잘 되지 않겠구나!'

 모택동은 참새들이 어떻게 하면 벼를 쪼아 먹지 않을까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참새를 박멸하라!>

베이징 시민들은 참새 박멸을 위해 독극물을 쓰고, 포수들도 동원하였습니다.

시민들은 참새들이 앉으려 하면 꽹과리를 치며 벼에 앉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나무에 앉아 쉬려고 하는 참새들도 꽹과리 소리에 하늘을 날아다녀야만 했습니다. 

결국 하늘을 날다 지친 참새들은 지쳐 땅으로 떨어지고, 독극물에 죽거나 포수들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렇게 참새 박멸 작전으로 약 2억마리의 참새를 없앴습니다.

모택동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올해 풍년 농사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풍년은 개뿔~~ 가을에 추수를 해보니 오히려 엄청나게 쌀 생산량이 줄었습니다.


그리하여 1958년 한 해동안 굶주림에 약 200만명이 죽고, 

그 다음 해에도 쌀 생산량이 적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였습니다.

참새를 박멸하니 그동안 참새들이 잡아 먹었던 해충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해충들이 벼를 갉아먹어 대흉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택동은 어쩔 수 없이 참새 박멸 작전을 중단하고

은밀하게 소련으로부터 참새 20여만 마리를 긴급 지원받았습니다.

하지만 2억 마리나 죽였는데 20여만 마리의 참새로는 벼농사를 풍작으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결국 모택동은 이 작전의 실패로 권력 퇴진을 압박 받아 2선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으며,

중국 인민 수 백만명이 목숨을 잃는 대인재를 초래하였습니다.

지도자의 판단 착오가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는지....역사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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