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랄식품이란?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교도들은 약 20억명이다.

우리나라에도 이슬람교도들이 일자리를 찾아 

들어와서 이슬람 율법을 지키며 생활하고 있다.

이슬람이라면 어딘지 모르게 꺼려지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대부분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슬람 율법을 지키며 이슬람 율법이 허락하는 것을

할랄이라고 한다.


그 중 이슬람 율법에 허락되어 이슬람교도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할랄식품이라고 한다.


이슬람에서 금하는 돼지고기나 술이

들어간 식품은 할랄식품이 될 수 없다.

고기라도 이슬람식으로 도축된 이른바

다비하에 따른 고기만이 할랄 식품으로 인정을 받는다.


다비하 도축 방식은 도축될

동물의 머리를 메카를 향하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도축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를 외친 후

날카로운 칼로 깊게 목을 찔러 순간적으로 도축한다.


피가 나면 동물을 거꾸로 매달아 피를 다 뺀다.

피를 먹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기절 시킨 후 도축 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동물들의 고통이 크다고 하며

다비하 방식의 도축을 비난한다.


돼지고기를 금하는 까닭은

여기를 읽어보기 바란다.


세계적으로 이슬람교도가 많으니

할랄식품을 수출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할랄 식품 인증을 받아야 한다.

조리 과정도 하람식품(이슬람에서 허용되지 않은 식품)과

함께 조리되거나, 살짝 거쳐간 식품일지라도

할랄 식품으로 인증을 받지 못한다.


특히 돼지고기를 요리했던 식기에

할랄식품을 만들었다면

인증을 받을 수 없다.

술도 살짝 인정하는 이슬람 국가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술은 하람식품이다.

그러므로 술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음식은

할랄식품으로 인정을 받을 수 없다.


<할랄식품의 예>

-알코올 성분이 없는 식품

-낙타, 소, 양, 닭, 오리 등의 고기

-우유

-민물고기를 제외한 생선

-야채, 과일, 견과류 등


<하람식품의 예>-무슬림 금지식품

-술 종류

-돼지고기 종류

-동물 피, 육식 동물, 개, 고양이 등

-민물고기

-파충류나 곤충 등

-도살 전에 이미 죽은 동물

-다비하 방식으로 도축 되지 않은 동물


영락제와 정화의 원정


영락제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4남이다.

주원장이 4남인 주체를 연왕에 봉하여 북평을 다스리게 한다.

주체는 북평을 잘 다스려 부강한 나라로 만든다.


주원장은 1398년에 죽는다.

주원장의 장남인 주표는 병약하여 일찍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주표의 아들 주윤문이 2대 황제가 된다.

주윤문(건문제)이 즉위한 후 비대해진 연왕을 

제거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연왕을 정면 공격한다면 조카가 삼촌을 치는 격이므로 명분이 서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첩자와 자객을 몰래 보냈는데 이를 알고 연왕은 한 여름에도 난로를 끼고 있거나, 시궁창에서 잠을 기이한 행동을 한다.

거짓으로 미친 척을 하여 건문제의 시야를 흐리게 한 것이다.


연왕은 지하에서 무기를 만들고 정예병을 훈련 시킨 후 건문제를 치러 갔다. 하지만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는 위기가 있었다. 건문제는 숙부님의 생명을 빼앗지 말고, 지나치게 압박하지 말라고 하여 연왕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연왕은 영왕을 회유하여 함께 건문제를 공격하여 마침내 1402년 남경을 빼앗았다.


남경에 들어간 연왕은 스스로 황제에 자리에 올라 영락제가 된다.

영락제는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명나라 3대 왕이 된 것이다.

그런데 남경을 함락했어도 건문제를 찾지 못했다.


황궁에 불이 나서 불에 타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건문제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영락제는 건문제가 살아 있어 언제 다시 자신을 노릴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동창>이라는 부대를 창설하여 건문제의 행방을 쫓게 했다.

중국 땅 모두를 뒤졌지만 건문제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영락제는 "혹시 다른 나라로 도망간 것은 아닌가?

다른 나라 군사를 빌려 쳐들어오면 어떡하나?

음. 그렇다면 빨리 찾아야겠다."


영락제는 건문제의 행방을 찾으려고 이제는 다른나라에 사람을 파견하려고 한다.

이 일을 환관인 정화에게 임무를 부여한다. 정화는 영락제가 데리고 있던 심복으로 영락제가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정화는 다른 나라의 말도 잘하기에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1405년 대형선박 62척과 함께 항해를 하게 했다.

일명 정화의 대원정이라고 한다.


명나라에 도전하는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나라들에게 명나라의 위세를 높이고,

정화를 환대하는 나라에게는 도자기, 비단, 금은 보화 등 많은 선물을 주었다.

건문제를 찾기 위한 목적과 조공무역의 목적도 있었다.

이렇게 정화의 원정은 7번에 걸져 이루어진다.

하지만 원정을 갈 때마다 수많은 예산이 필요하여 영락제가 죽은 후에는 중단된다.


콜럼버스의 배보다 30배 정도의 훨씬 큰배를 가지고 해외 원정에 나섰던 정화는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지도 않았고, 노예로 잡아가지 않았고,

종교도 강요하지 않은 것이 콜럼버스와의 차이점이다.


개빈 멘지스라는 학자는 정화의 함대가 이미 아메리카 대륙을 갔다 왔으며

나중에 콜럼버스가 항해를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화의 함대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주장이 새삼 놀랍다.


노블레스오블리주의 상징인 칼레 시민 6명


영국과 프랑스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전쟁을 하였다.

이른바 백년전쟁이다.

항상 대립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영토문제와 왕위 계승권 문제로

인류 역사상 가장 길었던 백년전쟁을 한 것이다.


원래 영국은 섬나라로 유럽 각국과 교류가 적었다.

그러니 국가 발전도 유럽 나라들보다 더딘 편이었다.

그런 영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며

차츰 유럽의 강국으로 떠오른 것이다.

영국은 프랑스가 항복할 정도로 몰아 붙였지만

잔다르크와 포병들의 활약을 앞세운

프랑스가 극적으로 전쟁을 승리하게 된다.


중세 유럽은 각국 왕실끼리

결혼을 하며 혈연 관계를 유지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왕실끼리 결혼을 하며

복잡한 혼인 관계를 맺는다.


많은 프랑스 영토를 가진

프랑스 왕족들이 영국 왕실과 혼인한다.

그러면 프랑스 영토가 영국 왕실 영토로 바뀐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영국 왕실이

프랑스 왕실보다 프랑스 영토를

많이 차지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러니 프랑스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


또 프랑스 왕실의 왕위 계승권에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1328년 샤를 6세 사후, 왕위 계승은 사촌동생인

필리프 6세에게 돌아갔다.

그러자 영국왕인 에드워드 3세가

왕위 계승권에 문제가 있다고 반발하였다.

에드워드 3세는 샤를 6세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영토 문제와 왕위 계승권에 대한 문제로

영국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당시는 프랑스가 영국보다 강국이었지만,

영국의 군사들은 용감하게 싸워 프랑스를 몰아 붙였다.


특히 칼레에서는 영국군에게 포위당하여

약 1년 동안 버티지만

결국 영국에 항복하고 만다.

칼레 시의 항복 사절단은 영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자 에드워드 3세는 모든 칼레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지만,

영국에 반항한 것에 대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 책임으로 칼레 시민 중 6명을 처형할 것이라고 말했다.


칼레시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누가 죽음을 자청하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그때 칼레시의 가장 부자인

생 피에르 라는 사람이 죽음을 자청한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할 용기있는 사람이 나오길 원했다.

그러자 법률가, 시장 등 칼레시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사람들이

앞다퉈 나왔다.


이렇게 정해진 6명은

에드워드 3세 앞으로 가서 처형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3세의 왕비가 

"나는 임신한 상태입니다.

제발 잔인한 처형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간청을 한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죽음을 자청했던 6명 모두를 살려준다.


칼레 시민을 위하여 가진 자들의 용기와 희생정신을

후세 사람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광녀 후아나의 삶

1. 후아나의 가족관계

광녀라고 알려진 후아나는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셋째 자식이다.
위로는 언니와 오빠가 있었다.
큰 언니는 포르투칼에 시집을 갔다.
페르난도는 둘째인 오빠와 셋째인 자신을
합스부르크 가문에 결혼시키려고 하였다.
그렇게 해야만 위협적인 프랑스에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2. 후아나와 펠리페

후아나는 어쩔 수 없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시집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너무 멋진 남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펠리페였다.
상당한 미남자였는데 나이도 동갑이어서
후아나는 한눈에 반하고 만다.
그래서 바로 펠리페와 결혼을 한다.
후아나는 펠리페를 너무나 사랑했다.

하지만 펠리페는 결혼 전에도
많은 여자들과 친분을 과시했는데
결혼 후에도 이여자 저여자 찝쩍거리며 바람을 피웠다.
후아나는 선천적으로 정신적 문제가 있어
집착과 분노가 심했다.
남편이 자꾸 밖으로 겉돌자 주술사들을 불러들여서
기괴하고 납득하지 못하는 행동을 자주 하였다.
그러니 사람들도 그녀를 보고 광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3. 후아나의 왕위 계승과 기행

한편 후아나의 언니와 오빠 그리고 그의 자식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이 발생하였다.
셋째이므로 왕위 계승을 할 것이라 생각도 못했는데
별안간 카스티야아 아라곤의 왕위 계승자가 된 것이다.

이사벨 여왕 사후 카스티야 여왕이 되어 귀국하게 되는데
정신적인 것을 문제 삼은 페르난도가 섭정을 하며
권력을 독점한다.
이에 후아나는 남편 펠리페를 카스티야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펠리페가 갑자기 죽는다.
여기서 후아나는 가뜩이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데
완전 이성을 잃고 만다.

죽은 남편 펠리페를 살려보겠다고 용하다는
수도원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한다.
그것도 남편 시신이 든 관을 마차에 끌고 다니면서
기도를 한다고 다니니 국민들은 후아나에 대해
완전 실망하고 만다.

어떤 때는 고생고생하며 도착한 수도원에 수녀가 있다는
이유로 다른 수도원으로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죽은 남편이 살아나서
수도원의 수녀와 정이 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집착이 강했고,
정신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러자 아버지 페르난도는 그녀를 수도원에 감금시킨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카를로스에게 왕위 계승권을 넘긴다.

왕위 정통성에 맞게 왕위에 올랐던 후아나는
유럽의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여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허울뿐...
단 하루도 편하게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감금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정말 정신적인 문제로 감금된 채 살아야 했는지,
아니면 왕위 계승을 두고 벌어진 정치적 희생이었는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들 카를로스가 왕위에 올라서도
감금된 자신의 어머니를 풀어주지 않고
그대로 평생을 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여행 시 가이드의 후아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집착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헛웃음이 나왔었다.
그래서 그녀를 그린 프라디야의 광녀 후아나 그림을 
다시 뜯어보았었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그녀의 집착과 그녀의 하인들의
허탈감과 무기력, 절망감 등을 표현한
광녀 후아나를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왕이지만 비참한 삶을 살았던
그녀가 한없이 가여워졌다.



일본과 독일의 과거사 반성

일본은 우리 나라를 36년간 괴롭히고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서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등

많은 독립투사들이

일제에 항거하다 돌아가셨다.


식민지 말기에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서

징용, 징병, 정신대 등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진주만 기습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의 원자폭탄 두 방을 맞고

무조건 항복을 한다.

이로서 조선을 괴롭혔던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가해국에서

하루 아침에 원폭 피해국으로

포장된다.


소련과 미국의 냉전 체제에서

일본은 슬그머니 자유 진영 체제에

편입되면서 전범 처리나 과거사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일은 유대인을 학살하고

유럽을 전쟁의 포연으로 만들었으나

전범을 처리하고,

사과와 반성이 이루어졌다.


이게 일본과 독일의 과거사 시점이다.

아직도 일본은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전쟁을 미화하고 있다.


징용이나 징병도 조선인들이

조선에는 일자리가 없어

돈벌러 온 것 아니냐고 한다.

정신대 또한 스스로 자원해서

하지 않았느냐고 억지를 부린다.

아직도 일본 지도자들은

일본 전범들을 모아 놓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나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면

반드시 사과와 반성을 해야 한다.

그게 올바른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그게 국가라면

더욱 더 사과와 반성을 해야 한다.


똑같이 잘못을 저지른 독일을 보고

일본도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 잡고 

주변국에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할 것이다.


천연두와 페스트 생물학전

우리들이 마마라고 불리는 천연두

중남미 아메리카의 제국을 무너뜨린 질병이다.

천연두에 걸리면 2주 정도의 잠복기를 거쳐

발열, 두통, 요통이 일어나고 피부 질환이 발생한다.

피부에 수포가 생기다가

폐혈증, 폐렴 등이 발생하여 사망률이 높은 질병이다.


1519년 서유럽의 대항해시대

스페인의 코르테스 부대는 아스텍 제국에 도착했다.

아스텍인들은 코르테스의 외모가

자신들이 믿는 구세주 <케찰코아틀>과 비슷하여

신처럼 떠받들었다.


그런데 코르테스 부대와 접하면서

아스텍 사람들은 하나 둘씩 죽어나갔다.

바로 그들이 가져온 것은 천연두라는 처음 보는 질병이었다.

유럽인들은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스텍인들은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고작해야 300여명의 코르테스 부대가

1521년 아스텍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인구의 절반 이상이 천연두로 사망하였기 때문이었다.

아스텍인들이 원인 모르게 죽어나가자,

이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아스텍 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라틴아메리카로 이동하였는데,

이에 따라 천연두 바이러스도 함께 퍼져 나갔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의

잉카문명, 마야문명, 아스텍 문명과 같은

많은 제국이 쓰러져 갔다.

코르테스가 의도적으로 천연두 균을

라틴아메리카에 퍼트린 것은 아니다.


영국인들은 북아메리카를 먹기 위해

고의적으로 천연두균이 묻은 담요나 옷을

인디오들에게 선물하였다.

그래서 인디오들은 천연두에 감염되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몽골인들이 유럽 원정 시 죽은 시체를 성 안에 던져서,

페스트 균이 성안으로 퍼져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던 페스트. 

이로 인해 유럽 인구의 1/3이 죽어 나갔던 질병이다.


중앙아시아에서는 풍토병이었지만 유럽에서는 생전 처음 접하는

병원균과 기근으로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전쟁에 사용한 천연두와 페스트는

아마 생물학전의 시초가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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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의 유래


BC 496년 오왕 합려는 월왕 구천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오왕 합려는 간신히 도망갔으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고 말았다.


죽을 때 태자 부차에게 나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그때부터 태자 부차는 아버지의 유언을 가슴 깊이 새기며,

편안한 잠자리가 아닌 거친 장작더미에서

잠을 자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오왕 부차가 복수를 위해 한을 품고 있다는 것을

월왕 구천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정벌하러 갔다.

하지만 그때는 오왕 부차가 군사력을 키우고,

치밀한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월왕 구천은 패퇴하고 말았다.


월왕 구천은 대부분의 영토를 오나라에게 주고,

신하가 된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월나라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제 월왕 구천은 쓸개를 늘 옆에 두고

맛을 보며 복수할 날만 기다렸다.

밥도 거친 밥만 먹고,

충신을 곁에 두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였다.

특히 범려의 말을 잘 듣고 복수를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오왕 부차가 미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서시란 여인을 미인계로 유혹하였다.

오왕 부차는 서시를 매우 총애하게 되고,

월나라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였다.

서시에 빠져 정사를 잘 돌보지 않자, 오자서가 간언을 하였다.

서시를 멀리하고 국정을 살피라는 수차례 간언을 하자

오왕은 오자서를 차츰 그를 멀리하게 된다.

오자서를 오나라의 운명이 바람앞에 등불이라 여기고,

자신의 아들을 제나라로 보낸다.

그런데 그와 사이가 나빴던 백비라는 사람이 모함을 하여

오왕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결하라고 명검을 보낸다.


오자서는 한탄하며 죽는데, 

그때 자신의 두 눈을 빼서 동문에 걸어달 라고 하였다.

오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오왕 부차는 이 소식에 격노하여

오자서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국력을 계속 키우던 월나라 구천은

오왕 부차가 제후들을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급습하였다. 

그동안 길러온 군사력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공격으로 오나라의 항복을 받아냈다.


다시 월왕 구천은 지난날의 치욕을 씻은 것이다.


오왕 부차가 자신을 살려둔 것처럼,

구천은 오왕 부차를 살려두고

귀양을 보내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국정을 게을리 한 것을 후회하며 자결하고 말았다.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

와신상담의 유래이다.


와신 - 臥薪 - 통나무, 장작나무 위에 눕다.

상담 - 嘗膽 - 쓸개의 맛을 보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당연히

사이가 좋지 않는 나라였다.

그래서 지금도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을 말할 때

오월 이라고 말을 한다.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같은 일을 하게 될 때는

<오월동주>라고 한다.

즉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끼지 같은 배,

같은 장소에 함께 있을 때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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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왜 돼지고기를 금할까?

돼지고기 먹지 않는 이유

이슬람 사회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먹지 말라고 그들의 경전인

쿠란에 적혀 있기 때문이다.

맛있는 삼겹살과 영양분이 풍부한 돼지고기,

기르기도 쉬운 돼지고기를 왜 먹지 말라고 했을까?


이유를 찾으려면 그들의 종교 발상지가

사막 지역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막지역 유목민들은 가축 사육의 주된 이유가

고기와 우유의 생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돼지의 우유는 사람이 먹지 못한다.

사막에서 필수품인 유제품을 생산하지 못하고,

돼지는 가죽으로도 사용하지 못한다.


사람처럼 잡식 동물이라

사람이 먹는 것을 돼지가 먹게 된다.

먹고 난 배설물은 연료로도 사용할 수가 없다.


유목생활을 하려면 이동 생활을 해야 하는데,

짐을 돼지 등에 얹고 나를 수도 없다.

특히 다리가 짧아 이동하는데 도움이 안된다.


돼지고기는 사막의 자연 상태에서

쉽게 부패하고, 건조 시키기도 좋지 않다.

이렇게 이슬람교에서는

돼지는 더럽고 불결하고 쓸모없는 동물로 인식된 것이다.

그래서 쿠란에는 돼지 사육이

매우 소모적이라고 예언적으로 표현하였다.


만약 이슬람교가 한국에서 발생되었다면

영양가 있는 돼지고기를 많이 먹으라고 했을 것이다.


이처럼 종교도 어디에서 탄생 하였느냐에 따라

그 지역의 생활과 문화가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종교를 이해하는 것은

탄생한 종교의 지역 문화를

이해하게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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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이야기

중국에서 여자로 권력을 누리거나 황제까지 오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측천무후와 서태후입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아들까지 몰아내고 황제에 오른 입지전적의 여걸입니다.

하지만 당나라를 더욱 부강하게 만드는 기틀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서태후는 그렇지 못하고 악녀의 이미지가 더욱 강합니다.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출세의 꿈을 안고 궁녀로 들어갑니다.

야망까지 있어 함풍제를 모시는 환관들의 환심을 사서

드디어 함풍제의 눈에 들게 됩니다.


함풍제의 혈육까지 낳아 의귀비로 봉해집니다.

당시 청나라는 나라 안팎으로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대내적으로 태평천국의 난,

대외적으로는 영국과 프랑스의 침입으로 나라가 힘들었습니다.

서태후는 함풍제 주변에서 정치를 관여하기도 하였는데,

그만 함풍제가 병사하고 맙니다.

함풍제가 죽고 난 다음 서태후가 낳은 아들

이외에는 후계자로 마땅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5살밖에 안된 동치제가 황제로 즉위합니다.

 5살밖에 안된 황제이므로 황제의 어머니인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서태후의 수렴청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서태후는 동태후에게 도움을 청하여 둘이 함께 수렴청정을 합니다.

공동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었으나

당시 동태후는 글을 잘 읽지 못하고,

정치에 뜻이 없어 서태후가 정치를 이끌어 가게 됩니다.

(자금성 동쪽에 살아 동태후, 서쪽에 살아 서태후라는 명칭이 붙여짐)


함풍제 동생인 공친왕과 연대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서태후는

청나라의 자강운동에 힘을 쏟아 태평천국의 난도 잔입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동치제는 친엄마인 서태후보다 동태후를 더 따랐고,

황후 간택도 동태후가 추천한 인물을 선택하였다.

이에 서태후는 사치로 스트레스를 풀었고,

수천벌의 옷, 수많은 보석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서태후가 분수에 맞지 않게 생활하자

동태후가 서태후에게 함풍제의 유서

-만약 서태후가 분수를 지키지 않으면 죽여라-를 보여줍니다.

이에 서태후는 깜짝 놀라 납작 업드립니다.

어느날 동태후가 병이나서 서태후는 지극정성으로 간병합니다.

이에 감동한 동태후는 함풍제의 유서를 소각합니다.


유서가 없어지니 서태후는 이제 동태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외간 남자들을 불러다 정을 통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동치제에게도 정치에 관심없도록 향락의 세계로 인도해 줍니다.

결국 동치제는 향락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성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다음 황위는 함풍제의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4살짜리 광서제가 즉위합니다.

광서제는 커감에 따라 부패해가는 청나라를 보며 걱정을 하지만

서태후의 권력이 너무 막강해 하고 싶은 일을 못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입지를 확립하기 위해 청일 전쟁을 일으키지만,

서태후가 그 유명한 이화원을 건립하는데 전쟁자금을 빼돌립니다.

(이화원이 지금은 관광지로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결국 일본의 승리로 청일전쟁은 끝이 납니다.

광서제가 변법자강운동을 하려고 하지만

그를 유폐시키고 광서제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죽입니다.


누구도 서태후를 제지할 수 없는 상황이고, 그녀는 사치와 향락은 점점 커져만 갑니다.

반면 청나라는 더욱 쇠약해져 가고 몰락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녀 역시 늙고 쇠약해진 가운데 생일잔치에서

너무 많은 음식을 먹고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유언을 남깁니다.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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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최악의 판단미스 진주만 공습

세계 제 2차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원래 서로 전쟁을 하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독일이 프랑스를 함락시킨 틈을 타서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출합니다. 

"일본은 아시아의 독립을 지키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권을 만든다." 

라고 주장하며 침략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러자 이곳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원유 수송을 차단하고 경제적 제재를 취합니다.

 그러자 일본은 미국과의 우월한 협상을 하기 위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습합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전함 5척이 파괴, 200여대 항공기 파괴, 2,000여명의 사망 등 

전술적, 인적, 물적인 피해를 많이 봅니다.

 진주만을 무력화 시킨 후 일본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무혈입성 하다시피 점령합니다.

 

일본은 일본이 내건 평화협정을 미국이 따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섬 지역의 지배권을 달라고 요구했지요.

협상은 커녕 많은 피해를 본 미국은 격분하게 되고, 

그 동안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참전을 선언합니다.


이후 산호해 전투와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승리하여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 패퇴하고 맙니다.

가미카제 특공대 등을 앞세운 일본 군부는미국에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했는데,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최후의 방법으로

인류 최초로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먹입니다.


8월 15일 원자폭탄의 위력을 본 일본 국왕은

 무조건 항복한다는 발표를 하며 일본이 패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지 말고, 

서희의 외교담판처럼 미국과 외교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배제한 일본은 너무나 큰 피해를 보고 말았습니다.

지도층의 오판이 일반 국민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준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하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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