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트칙령이란 프랑스 국왕이었던 앙리4세가 낭트에서 발표한 칙령인데 칼뱅파 개신교인 위그노의 신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한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하게 신앙의 자유만 보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신교와 구교사이에 발생했던 해묵은 갈등을 타파하고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을 넘어 국민통합과 평화의 공존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낸 앙리 4세는 지금도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앙리 4세 이전의 왕들은 구교를 국교로 하고, 신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많은 탄압과 재산 몰수 등의 처벌을 하였습니다. 파파라치처럼 그 당시에도 신교를 믿는 사람들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었는데, 몰수한 재산의 25%을 위그노를 신고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위그노를 신고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다녔는데 이를 위그노 사냥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앙리 4세가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더이상 나라가 분열되는 것을 볼 수 없어서 위그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고 또 모든 국민은 신앙에 따라 차별받지 않도록 하였으며 프랑스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였습니다. 

  앙리 4세도 원래는 위그노였으나 프랑스의 왕이 되면서 구교로 개종하였습니다. 국왕 스스로 신교와 구교를 모두 껴안은 정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에게 일요일에는 냄비에 닭 한마리씩"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것은 신구교도간의 갈등에 시달린 프랑스 국민의 마음을 매우 잘 헤아린 말입니다. 국민들은 신앙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서로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냄비에서 고기가 끓는 냄새를 그리워하였습니다. 이렇게 통합과 화합, 경제적인 문제도 생각했던 것입니다.

  개신교의 입장에서 앙리 4세는 낭트칙령으로 호감을 받기는 했지만,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배신자라고 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것보다는 프랑스의 평화와 통합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함께 고생했던 신교들을 잊지 않고 낭트 칙령을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고 박해나 차별을 하지 못하게 하고 국민들의 이익울 추구한 정책을 추진한 것입니다.

  일국의 왕이라면 자신의 생각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지 앙리 4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역사책에는 '앙리 대왕', '선량왕 앙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프랑스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앙리 4세의 정책을 종교적인 갈등을 끝내고 경제적인 성장을 가져오며 유럽의 강자로 떠 올랐습니다. 하지만 앙리 4세의 손자였던 루이 14세가 등극하면서 종교적인 갈등이 다시 생깁니다.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며 낭트 칙령을 폐지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위그노들을 탄압하고 불법화 하였습니다.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하나의 군주,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률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절대왕권이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두 개의 신앙이 아닌 한 개의 신앙만 인정하게 됩니다.

  프랑스는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몽텐블로 칙령으로 위그노들이 탈프랑스 하였기 때문입니다. 위그노들이 떠난 것이 뭔 문제가 되었을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위그노들이 아주 중요한 것이 그들이 상공업 종사자였기 때문입니다. 직업 소명설을 주장한 칼뱅의 생각대로 위드노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프랑스를 떠나니 인재들이 많이 빠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상공업자를 비롯한 각종 기술자들이 프랑스를 빠져나가 프랑스의 경제가 휘청거리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망명한 곳이 영국, 프로이센, 덴마크, 네덜란드 등인데 이 국가들은 나중에 경제국 강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몽텐블로 칙령의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짐이 곧 국가다 라고 말하며 절대왕정을 꾸리면서도 위그노들에게 좀더 관대했더라면 당시에 프랑스는 세계를 제패하는 패권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낭트칙령과 앙리 4세를 읽고 강압보다는 관대함이 사람을 움직이고 나라를 움직인다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저는 작년까지 아침 저녁으로 2번씩 목욕탕을 다녀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온천으로 가서 샤워 및 탕목욕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는 9시쯤 헬스장 운동하고 난 후 온천욕으로 하루를 정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하루에 한 번으로 줄였습니다. 이사 간 곳이 목욕탕하고 멀어서 아침에 갔다오면 출근하기 빠듯하여 어쩔 수 없이 하루에 한 번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 상 온천욕은 저녁보다 아침이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차로 3분거리인 온천탕에서 샤워하고 탕목욕을 하면 정말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복 30분정도 걸리는 곳으로 이사를 가니 아침은 패스하고, 저녁에만 하게 됩니다. 저녁이 별로 안 좋은 점은 22시쯤 탕 속에 들어가면 어떤 때는 불쾌한 냄새가 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으니 불쾌한 냄새가 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샤워기로 몸을 닦고 탕 속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갑니다. 

  이렇게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목욕을 하며 하루의 피로를 풀고, 건강도 챙기며, 청결한 생활을 합니다. 인도에서는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면 그동안의 죄가 모두 씻겨 나간다고 하여 열심히 몸을 닦습니다. 그래서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루이 13세는 7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목욕을 했다고 합니다. 1601년 퐁텐블로에서 루이 13세가 태어났습니다. 왕실의 사람들은 모두 좋아하고 사람들은 루이 13세의 탄생을 축하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실의 건강을 돌보던 왕실 주치의는 루이 13세를 거의 씻기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아이들은 목욕을 잘 시키지 않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더러웠던 루이 13세를 7살이 되어서야 제대로 닦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왕실이 이러하니 일반 국민들도 닦지 않는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은 왕과 일반 백성들은 왜 이렇게 씻지 않았을까? 라는 것입니다. 닦지 않으면 지독한 냄새가 날 것이고, 몸이 더러우니 각종 세균에 노출되어 병에 걸리기 쉬운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터키에서 온 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 안에는 쥐들이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쥐들은 병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병균이 퍼지고 퍼져 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그 쥐들이 가지고 있던 병균이 페스트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창궐하게 된 것입니다. 한번 걸리면 생존하기 어려웠습니다. 

  도대체 이 병균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염이 될까? 페스트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던 사람들은 목욕을 하면 흑사병 병균이 피부를 통해 내 몸안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물을 통하여 흑사병이 전염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흑사병 전염 경로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목욕을 하지 않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냄새가 나고 더러웠습니다. 하지만 목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흑사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흑사병이 전염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올바른 대처 방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흑사병으로 인하여 유럽 전역에 죽음의 공포가 깊게 드리워졌습니다. 흑사병은 이내 전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무서운 속도로 전염되어 유럽인 25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목욕을 하지 않았는데도 흑사병이 계속 창궐하자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도대체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신에게 더욱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목욕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흑사병을 일으킨다고 멀리했던 목욕이 청결과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는 행동이 된다고 믿게 된 원인이 뭘까요? 그건 세균학자 파스퇴르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s자 형태의 플라스크로 실험했는데 세균은 중간에 걸러져 침투할 수 없고 오로지 공기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실험결과를 얻었습니다. 즉 질병의 원인이 세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목욕을 하면 오히려 세균을 떨쳐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보다 더욱 자주 씻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페스트 등의 감염병에 대한 정확한 원인을 몰라 이러한 병이 물을 통해 감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욕하기를 두려워하였으나 파스퇴르의 실험결과 세균의 존재와 페스트가 공기로 감염된다는 것을 알게 된것입니다. 또 더러운 것을 만지면 세균이 손에 묻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손에 묻은 세균을 없애거나 위생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목욕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청결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목욕용품이나 시설이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고, 요즘에는 목욕을 통한 치료와 온천을 통한 한방치료를 하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 약을 먹지 않고도 치료가 이루어진다니 목욕치료가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아침 저녁 너무 피곤하고 미세먼지나 황사가 극성인데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도고온천에 가서 맥반석 사우나와 온천치료를 해야겠습니다.

  

인류 최초이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현재의 이라크지역에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흘러 다른 중동지방보다는 비교적 물이 풍부한 편입니다. 이곳에서 발생한 고대 문명을 저는 중학교 때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문명 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럼 메소포타미아의 뜻은 무엇일까요? 메소포타미아 라는 지명이 있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일까요? 아닙니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두 강 사이에 위치하여 강물에 떠내려 온 흙이 쌓이면서 넓은 평야지역을 이루게 됩니다. 이 땅은 많은 거름기를 함유하고 있어 농사가 잘되는 땅이었습니다. 이 넓은 지대의 모습이 초승달 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비옥한 초승달이라고 불렸는데요. 메소포타미아는 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두 강이 흐르고 있어 이 지역에는 많은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지요? 아닙니다. 이 지역의 연간 강수량은 매우 적은 편입니다. 그런데도 이 지역에 강이 있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그건 이 지역의 북쪽 산간지대에서 시작된 물이 흘러 내려서 강을 형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두 강의 하류 지역에는 수메르 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두 강의 하류지역을 수메르라고 부르며,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을 수메르 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수메르 인들은 북쪽 지방에서 남으로 이주한 사람들인데 이미 농사기술을 터득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농사도 잘 되는 지역에서 농사 기술을 알고 있는 수메르인들은 많은 양의 곡식을 수확하기도 했지만 유독 홍수가 많은 지역이라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신에게 빌어보기도 하고, 힘 닿는 대로 관개공사를 통해 토지를 넓히고 홍수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수메르 인들이 노력한 결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때 대표적인 큰 도시는 유프라테스 강의 하류에 있는 우르크였습니다. 이 우르크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을 꽃피우고 도시도 발달했으니 수메르 인들은 살기 좋았겠지요. 하지만 아직도 위협요소가 있는데 그건 바로 홍수의 피해가 크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관개공사를 잘해도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상류에서는 물이 빠르게 흐르다가 하류에 와서는 퇴적 작용이 있어 퇴적물이 쌓이고 쌓여 물길을 막습니다. 그러다가 막힌 물길이 강둑을 넘어 들판으로 흘러 들어가 농경지를 쓸어버립니다. 애써 만든 농경지와 재배한 농작물이 쑥대밭이 되니 정말 홍수가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전쟁이었습니다. 잦은 홍수로 인해 우리들이 먹을 것이 없으면 다른 지역을 침입하여 식량을 약탈해 와야겠지요.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평야지역이라 다른 지역을 쳐들어가기 무척 쉬웠지요. 그래서 심심하면 전쟁을 하고, 다른 도시의 곡식을 약탈해 오는 것이 반복되어 사람들은 전쟁의 불안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뭔가 해결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거대한 지구라트라는 신전을 건설합니다. 수메르 인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니 신전을 만들어 신들에게 빌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전에는 전쟁의 신, 농사의 신 등 다양한 신들을 신전에 모셔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웃기는 것은 수메르 인들은 수메르 인들이 모셨던 신들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신이 아니라 무서운 재앙을 내리는 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에게 빌때에는 "농사가 잘 되게 해주세요." 가 아니라 "제발 우리 지역에 홍수 피해를 없도록 해주세요." 라고 빌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후의 세상을 빌은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바라는 것을 빌었습니다. 현실 세계가 살기 힘들어서 죽은 후의 세계를 생각조차 못한 것이지요.

  이렇게 현실 세계에서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했던 수메르 인들은 달력을 세계 최초로 만들어 냅니다. 수메르 인들은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삼아 달력을 만들었기에 수메르 인들의 달력은 태음력입니다.

  또 수메르 인들은 인류 최초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합니다. 바로 쐐기 문자인데, 문자의 모양이 쐐기처럼 생겼다하여 쐐기문자라고 부릅니다. 


최초 메소포타미아 통일 왕국 아카드 제국

메소포타미아 여러 도시 중 니푸르라는 도시는 최고신인 엔릴을 모시는 도시였습니다. 엔릴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최고신이므로 자연스럽게 니푸르 도시를 차지하는 왕을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니푸르는 원래 메소포타미아 최고 도시인 우르크의 지배를 받았으나, 차츰 남쪽으로 밀고 내려온 아카드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카드 도시국가는 점차 힘을 길러 사르곤 왕 때 수메르를 정복하고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통일하였습니다. 사르곤 왕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상류와 지중해 지역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이 국가가 바로 아카드 제국입니다.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대왕

함무라비 왕은 함무라비 법전을 만든 사람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의해 귀족들도 죄를 지으면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되고 또 자기 멋대로 펴인이나 노예들을 사적으로 처벌할 수 없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재판을 통해 법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지는 예나 지금이나 돈이 없어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 격차로 말미암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거지들은 먹고 살 것이 없어 동냥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자기도 먹고 살기 힘들어 남에게 동정을 베푸는데 인색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의 사회 전반의 부를 차지하여 일반 사람들은 그저 팍팍한 일상을 보내지 않는가 생각을 해 봅니다.

 지금은 아무나 거지가 될 수 있습니다. 무조건 가난하거나 사업하다 망하면 서울역이나 공원 등에서 노숙자의 삶을 살며 미래 없는 생활을 비관하며 술병에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지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버린 담배꽁초도 소중한 보물인양 탁탁 털어 불을 붙여 피우지요.

 하지만 예전 유럽에서 거지가 되려면 거지 허가증을 받아야만 동냥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12세기 유럽은 비단길을 통해 아시아와 활발한 무역을 하면서 경제가 매우 발전하였습니다. 상공업자들은 돈을 많이 벌며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지요. 하지만 이 당시 사회는 기독교를 중시하는 사회여서 돈만 추구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신이 아닌 돈을 추구하는 것이 보기 좋을리 없겠지요. 그래서 상공업자들과 같은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즉 거지들에게 적선을 하며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지들은 가만히 앉아서 부자들의 적선을 받아가며 쉽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4세기 중반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과 대기근은 수많은 신규 거지들을 쏟아 냈습니다. 유럽 전 인구의 20%정도가 거지였다니 시내를 걷다보면 마주치는 것이 맨 거지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의 의지로 거지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적선을 받으면 아주 쉽게 먹고 살 수 있는데 힘들게 일할 필요가 없던 것이지요. 부자들은 더 많은 적선으로 천국을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구요.

 아! 그런데 너무 많은 거지로 사회 문제화 되었겠지요. 그래서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는 거지 면허증을 받아야만 거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였습니다. 거지가 될 수 있는 자격에는 농촌 빈민, 고아 등 최하위 계층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었습니다. 이후 시에서는 주기적으로 거지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거지들이 동냥하면 불심검문하여 거지 면허증이 있는지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합법적인 거지만 동냥할 수 있게 한 것이지요.

 이 방법이 효과가 크자 다른 나라에서도 앞다투어 거지 면허증을 발급하였습니다. 영국에서는 거지 면허증 없이 동냥을 하다 적발되면 처음에는 태형과 감금, 그다음은 태형과 귀 절단, 세번째로 걸리면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지요.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엄하게 법을 만들고 몇 번 걸리면 사형에 처했지요. 하지만 먹고 살기 힘든 면허증 없는 거지들은 면허증 위조라는 방법을 썼지요. 그러다가 재수없이 걸리면 심한 벌을 받았습니다. 또 면허증 없는 거지들을 전문적으로 고발하는 거파라치도 있었습니다. 일명 거지 사냥꾼이지요. 그럼에도 거지 수는 계속 늘어나고 단속도 너무 힘들어지자 17세기에 이르러서 거지 면허증을 폐지하고 동냥하는 것 자체 또는 폐지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아다니는 거지들을 노동에 투입시키거나 수용소에 감금시켜 버린 것이지요.

 지금도 해외 유명 관광지에 가면 꼭 동냥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분들이 진짜 거지인지, 아니면 직업적인 거지인지 잘 모르겠으나 옛날 같으면 면허증이 꼭 있어야 되겠지요.

참 재미있는 거지 면허증입니다.


<터키식 목욕탕 하맘>

터키를 아시아로 본다면 유럽과 아시아는 이스탄불에서 만납니다. 

터키 영토의 많은 부분이 아시아를 차지하고 있지만 축구 월드컵도 유럽에서 하고 유로화도 사용하고 있으니 현재는 유럽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터키가 아시아에서 월드컵 예선전을 치렀다면 우리나라 및 다른 아시아 나라들은 터키 축구를 보며 한숨만 내쉬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탄불은 과거 콘스탄티노플로 동로마제국(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였으며 기독교를 믿는 사회였습니다. 

이슬람교의 수도자나 기독교인, 또는 상공업자들이 이스탄불에 오면 지친 몸을 풀기위해 가는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터키식 목욕탕이었던 하맘입니다.


우리나라도 목욕문화가 상당히 발달했는데요. 터키도 로마와 마찬가지로 목욕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이슬람 종교 의식으로 더욱 발달한 것 같습니다.

터키의 목욕탕 하맘에 들어서면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커다란 욕조탕이 있어 몸을 담그고 피로도 풀며 때에 따라서는 고함도 지르기도 합니다.

"어, 좋다. 아, 시원하다."라고 소리를 내지요.

저는 목욕을 매우 좋아해서 거의 매일 갑니다. 어느 때는 하루 2번씩 가기도 합니다. 제가 사는 곳에 온천이 있어 정기권을 끊어 갑니다. 다른 지역의 일반 목욕탕을 가면 정말 물의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뭔가 저를 감싸는 듯한 물의 느낌이 없어 허전합니다. 역시 온천물이 참 감촉이 좋습니다. 

 특히 욕조탕안에서 10여분 들어가 몸을 데우고 땀을 빼면 너무나 개운합니다.

그리고 천장에서 내려오는 폭포수. 이거 정말 마약과도 같습니다. 목욕가서 이거 안하고 나오면 뭔가 허전할 정도있니다. 물의 압력이 세서 처음 맞는 사람은 피부에 멍이 들 수도 있습니다. 어깨, 목, 허리 아픈 부분에 집중적으로 물을 맞으면 마사지가 되면서 근육의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 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빨리 가서 폭포수로 마사지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욕조가 터키의 하맘에는 없고 커다란 대리석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 대리석을 교백타쉬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온돌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잘 데워진 대리석 위에 사람들이 올라가 몸을 데우고 몸을 불립니다. 우리나라 찜질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찜질방에 좀 앉아 있으면 몸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는데요. 교백타쉬 위에서도 그런 느낌이 난다고 합니다.

그런 후 목욕관리사에게 일정 금액을 주고 부탁하면 때를 밀어줍니다. 우리나라에서만 때를 미는 줄 알았는데 터키, 이란 등 이슬람 국가에서도 이렇게 목욕을 한다고 합니다. 

때를 다 밀면 다음 코스로 거품 목욕을 합니다. 거품이 있는 통 안에 자루를 넣어서 거품을 뭍힌 후 손님에게 짜면 거품이 뿌려집니다. 목욕관리사는 거품을 손님의 온 몸에 바르고 손으로 밀면서 피로를 풀어줍니다. 

거품 마사지가 끝나면 목욕관리사는 손님에게 양동이로 물을 담아 뿌려줍니다. 양동이로 몇 번 물을 뿌리면 손님의 몸에 있던 거품이 제거됩니다. 이렇게 물세례를 뿌려 주면 터키식 하맘 목욕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터키의 하맘에는 왜 우리나라처럼 욕조가 없을까요?

터키의 이슬람 문화에서는 우리나라와 생각이 다릅니다.

깨끗한 물이란 흐르는 물이고, 흘러야 물이 깨끗해 진다고 합니다.

더러운 물은 고여있는 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고여 있게 만드는 욕조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욕조를 만들면 고여 있는 물이 될 것이고 그 물은 더러운 물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조 대신 세면대가 있습니다. 세면대의 수도에서 나오는 온수나 냉수로 몸에 뿌리면서 목욕을 하는 것입니다. 깨끗하다고 여겨지는 흐르는 물, 여기서는 몸에 뿌리는 물이 그들의 몸을 깨끗하게 해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찜질방에서는 아줌마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 꽃을 피우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소음 문제로 마찰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줌마들이 여론을 형성하고 의견을 모으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터키 하맘도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사람들을 만나고 여론을 만드는 장소였습니다.


<여인들을 위한 목욕탕 겔린 하맘-신부목욕탕>


여인들을 위한 겔린 하맘이라는 신부 목욕탕도 있었습니다. 예비신부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을 접대하며 자신의 결혼을 알리고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였습니다. 또 결혼할 나이의 여자들은 멋진 남편감을 만나게 해 달라고 동전점을 치며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여인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좋은 장소였겠지요. 아들을 둔 어머니들은 어떤 며느리가 좋은지 겔린 하맘에서 혼기에 찬 여자들의 정보를 주고 받는 장소로도 활용이 되었습니다.


<터키 이슬람 사원 - 자미에 들어가려면>


터키의 이슬람 사원을 <자미>라고 하는데 사원에 들어가려면 일단 몸이 깨끗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원 앞에 설치된 수도 시설에서 몸을 닦아야 합니다. 이렇게 씻는 행위를 압데스라고 하는데 손씻기, 입안 헹구기, 얼굴 씻기, 팔둑 씻기, 머리 쓸어내리며 귀 씻기, 발 씻기를 합니다. 


 이 행위가 몸의 더러운 것을 씻어낼 뿐 아니라 단순히 손을 씻는게 아니라 손이 했던 죄까지 씻겨져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좀 어색합니다. 자기 손으로 나쁜 짓하고 손을 씻으면 그 죄까지 씻겨져 나간다고 믿었다니, 이것때문에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많지 않을까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자미-이슬람 사원>를 만들면 반드시 세우는 건물들이 있습니다. 이슬람 관련된 대학, 도서관, 병원, 숙박시설, 시장입니다. 그리고 추가되는 시설 <하맘>입니다. 이슬람 종교의식을 행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하맘, 사람들은 지금도 하맘을 찾아 몸을 씻고 건강한 정신을 깃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닦는 것으로 터키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알 수 있는 하맘이었습니다.


<형제의 나라, 형제의 국가 터키>


하지만 현재 터키는 유럽인들에게 다소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15세기부터 오스만투르크의 이름으로 유럽의 기독교 사회를 위협을 가했던 국가라 그때의 원한이 지금까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나라도 일본이라면 나이 지긋한 어르신 중에 지금도 이를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식민지 기간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을 심하게 억압하고 핍박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그런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터키는 다른 이슬람국가처럼 이슬람 원리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터키가 주축이 되어 이슬람 종교가 더이상 테러를 가하지 않도록 거울이 되는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터키는 우리나라와 형제의 국가라고도 부르지요. 터키는 옛날 돌궐이라고 하는 나라가 위구르족에게 멸망당한 후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스만투르크를 세우게 됩니다. 돌궐은 우리 나라의 고구려와 친밀한 우방국가였기에 서로를 형제국가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돌궐의 후예와 고구려의 후예인 우리들은 계속 형제의 국가라고 부르는 것인데요. 6.25 한국전쟁 때에도 한국을 위해 싸웠던 터키와 계속 좋은 관계를 맺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베스파스아누스-콜로세움을 세우다>

이탈리아의 수도는 로마, 언어는 이탈리아어, 면적은 대한민국의 약 3배, 종교는 90%이상이 카톨릭을 믿는 나라입니다. 로마에는 찬란했던 과거 문화유산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요. 그중 콜로세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제가 콜로세움에 도착하여 딱 바라본 순간 느낌은 도대체 그 옛날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왜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습니다. 기중기나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가 없던 시절 오로지 사람의 힘을 이용하여 저렇게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폭군의 대명사 5대 네로황제는 반란군에게 쫓기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요. 그 다음 황제들은 1년 사이에 3명의 황제가 바뀌는 대혼란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원로원의 추대를 받은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의 9번째 새황제로 등극합니다. 새 황제는 황족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평범한 평민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출신 성분으로는 도저히 왕제에 오를 수 없었으나 그의 성실함과 인덕으로 황제에 추대되었던 것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런 출신성분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려면 이전 황제였던 네로와 차별화가 필요했습니다. 또 새로운 황제의 과제는 내전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의 첫번째 계획은 콜로세움을 세워 경제적 일자리를 창출하고 백성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대규모 공사를 계획하여 실천하였습니다. 콜로세움의 건축장소로는 네로 황제의 궁전자리가 낙점되었습니다. 네로 개인만의 궁전이었던 곳을 시민 모두를 위한 공공시설물을 짓겠다는 것이었지요.

 건축방식도 대단한 혁명입니다. 그건 바로 아치 형태의 건축양식과 벽돌과 콘크리트를 사용한 건축방식이었습니다. 아치 형태는 건축재를 적게 들이고 무게를 줄여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것이 장점이었습니다. 먼저 양쪽 기둥에 돌을 쌓고 목재로 아치 형태를 만든 후 그 위에 돌을 올립니다. 그런 다음 목재를 빼면 온전한 아치 형태의 건축물이 되는데요. 이렇게 하면 돌의 무게를 분산시켜 튼튼한 시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치만으로는 높은 건축물을 튼튼하게 건설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 로마인들은 석회, 물, 화산재를 혼합하여 시멘트 대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을 혼합하면 모든 돌들을 강하게 접착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자갈과 모래를 혼합하여 콘크리트 처럼 사용하여 건물을 공고하게 만들었습니다. 돌은 점토를 구워서 만든 테라코타 벽돌을 사용하였다. 테라코타 벽돌을 쌓아 튼튼한 석조 건축물을 만든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전 황제의 국고 낭비로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을 텐데 콜로세움을 건설하는데 쓰인 그 엄청난 재정을 어디에서 마련했을까요? 콜로세움의 벽돌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전리품으로 새 원형경기장을 만들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콜로세움을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황제의 명에 따라 유대함락을 추진하다가 황제로 등극했는데요. 그 자리를 자신의 아들 티투스가 대신 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서기 70년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습니다. 당시 티투스의 귀국길에는 수레가 끝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 수레에 실린 수많은 전리품들이 콜로세움 건설비로 충당되었고 노예들은 현장 노동자로 투입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스파이사누스 황제는 콜로세움이 거의 지어질 무렵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의 아들 티투스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콜로세움을 완공시킵니다. 

서기 80년 개장하여 100일간의 축제가 시작됩니다. 입장권을 받아 입장권에 쓰여진 출입구 번호에 따라 출입하여 신속한 출입이 가능하였습니다. 축제의 하일라이트는 검투사들의 무대였습니다. 노예들의 검투가 있었고 또 신분에 관계없이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검투사들은 사람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여자들은 검투사들을 만나 보려고 돈까지 주었다고 합니다. 

 또 콜로세움에 물을 받아 나우마키아라는 해전을 연습하는 모의 전투도 실시하였습니다. 정말 장관이었을것입니다.  또 다른 볼거리는 맹수들과 경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를 함락하고 그곳에서 들여온 사자, 표범, 곰 등과 인간과의 시합인 것이지요.

 콜로세움은 단순한 오락시설일뿐만 아니라 황제가 관중들의 환심을 사고 지지를 얻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교류의 장으로 활용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세월의 흐름속에 파손되고 훼손된 부분이 많은데요. 그래서 콜로세움은 아직 한창 보수중입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이 된다면 나우마키아도 재현해보고 모의 칼로 검투사 시합을 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늘 관광지에는 사람들이 붐비지만 겨울에 가면 사람들이 여름에 비해 적습니다. 콜로세움에 가셔서 관중석에 앉아 고대 로마인들의 함성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인도의 마지막 왕조 무굴제국

무굴제국의 기원은 몽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무굴이라는 말이 몽골지방에서 온 새로운 사람들이란 페르시아러입니다. 티무르제국이 망한 후 티무르 제국의 부활을 꿈꾼 티무르 제국의 후손이었던 바부르가 북부 인도를 거점으로 하여 나라를 세웁니다.

무굴제국에는 여러 왕들이 있습니다만 왕권이 강력했던 왕 아크바르 왕, 아우랑제브 왕, 그리고 타지마할 묘를 만든 샤 자한 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아크바르 황제(악바르 황제)>

제가 학교 다닐때에는 세계사 선생님께서 악바르 대제라고 말씀하셨으며 교과서에도 악바르 대제라고 씌여져 있던 것 같습니다. 둘다 같은 말입니다. 아크바르나 악바르나 둘다 발음이 세서 혹시 이 왕은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또는 악하게 다스려서 이런 이름이 붙었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름만 그렇다 뿐이지 실제로는 관용적인 정책으로 순하고 착한 임금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아크바르 대제 때에 무굴제국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습니다. 무굴제국의 영토도 많이 확장시킨 왕입니다.

아크바르 대제가 나라를 다스리던 인도는 토착신앙인 힌두교가 있었습니다. 힌두교는 소를 신성시하는 종교입니다. 무굴제국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제국인데 힌두교도들을 어떻게 했을까요?

아크바르 대제는 힌두교도들을 심하게 탄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달래고 어루만져주고 인정해주는 관용정책을 썼습니다. 대표적으로 관용정책으로는 기존 힌두교도들에게는 지즈야라는 세금을 걷었습니다. 그런데 아크바르 대제는 지즈야 세금을 폐지하였습니다. 이렇게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적당히 섞어서 나라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고자 노력했던 왕입니다. 비이슬람교도 끌어안고 무굴제국을 진정한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훌륭한 왕이라서 대제라는 칭호가 잘 어울리는 왕입니다.


<샤 자한 왕>

부인과의 로맨스도 있었지만 말년이 비참했던 샤 자한 왕. 왕위가 뭔지 아비와 자식간에도 공유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라는 것을 샤 자한 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부인은 뭄타즈 마할입니다. 샤 자한은 평소 뭄타즈 마할은 완벽한 여인이라고 하며 왕비를 사랑합니다. 둘 사이는 원래 결혼하기 어려운 사이였습니다. 샤 자한의 정적이 뭄타즈 마할의 이모였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그들은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다른 부인들과는 그냥 그렇고 그런 사이였지만 뭄타즈 마할과는 너무 좋은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자녀들도 14명이나 보았습니다. 하지만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그만 뭄타즈 마할이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녀를 너무 사랑했던 샤 자한. 너무나 큰 상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위해 묘당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인을 위한 무덤 타지마할 입니다.

샤 자한이 타지마할을 건축하면서 상당한 양의 국고를 쏟아부어 국고가 바닥나게 됩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타지마할 건설을 중지할 것을 여러 차례 건의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그때 건설을 중지했다면 지금 타지마할이라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볼 수 없었겠지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인도 건축물의 상징입니다. 태양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하얀색의 대리석은 각각 다른 빛깔로 변하기 때문에 너무나 장관입니다. 

입구에는 수로가 있으며 정원은 좌우로 잘 대칭되어 안정감과 균형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일출이나 일몰 때 야무나 강에서 바라보는 타지마할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꼭 봐야 할 타지마할 여행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입장료는 1,000루피로 인도 여행지 중 비싼 입장료에 해당합니다. 우리나라돈으로 환산하면 약 16,500원 정도 들어갑니다. 각국의 여행객들이 늘 북적북적거리는 타지마할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장소입니다.

 웅장함, 아늑함, 아담함, 약간의 소박함마저 느낄 수 있는 타지마할. 꼭 가봐야 할 여행지입니다.


 타지마할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일명 붉은 성이라고 불리우는 아그라성이 있습니다. 붉은 성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붉은 사암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샤 자한이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유폐되어 말년을 보낸 곳입니다. 이곳에서 병약했던 샤 자한이 타지마할 무덤을 바라보며 유폐된 모습을 생각하니 권력 무상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샤 자한 왕을 보면서 공민왕이 생각납니다. 공민왕도 원나라 공주였던 노국공주와의 로맨스로 유명하지요. 샤 자한은 왕비를 위해 타지마할 묘를 조성하고,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영전 건설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였지요. 말년도 비슷합니다. 샤 자한은 자식에게 버림 받아 유폐되어 쓸쓸하게 죽었고, 공민왕은 홍륜과 최만생에게 암살을 당하지요. 하지만 차이점도 있네요. 샤 자한은 14명이나 자식을 두었는데 공민왕과 노국공주 사이에는 한 명의 자녀도 얻지 못했습니다. 


아우랑제브(샤 자한의 세번째 아들)

 샤 자한이 늙고 병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병약한 왕을 대신하여 장남이 나라를 다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동생들은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이 기회다. 내가 이 나라를 통치해야 하는데....'

여러 형제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리고 피비린내 내는 왕자들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꼭 우리나라 조선시대 이성계가 병약하여 이방원과 다른 왕자들이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인 결과 세 번째 아들인 아우랑제브와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리하여 큰 형이었던 다라 시코를 처형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버지 샤 자한도 아그라성에 유폐시키고 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찾아보지도 않은 아주 불효막심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샤 자한이

  "나는 이제 권력도 없다. 먹는 것도 그렇고 여기가 매우 추워서 지내기 어렵구나.! 이렇게 애비를 박대해도 되느냐?"

이렇게 편지를 써도 아우랑제브는 전혀 아버지를 위한 어떠한 효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참 비정하지요. 자신의 왕권에 방해가 될 지도 모르는 아버지였기에 아마 비정하게 대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아우랑제브는 왕위에 오르자 이슬람 중심의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는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이슬람교도들에게 폐지시켰던 세금 지즈야를 부활시켰고 이슬람교 이외의 사원이나 학교는 파괴시킵니다. 세금을 부활시킨 것은 타지마할 묘를 건축하면서 엄청난 양의 국고가 낭비되어 이를 보충하기 위해 걷은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그가 즉위한 후 한참 후에 지즈야 세금을 걷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는 이슬람만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비이슬람교를 탄압하고자 부활시킨 정책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이렇게 이슬람교만을 위한 임금이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비이슬람교도들은 그의 정책에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나라의 영토도 남인도까지 넓혀서 무굴제국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엄격한 이슬람교적인 생활태도를 강요하고, 비이슬람교도들을 탄압하다 보니 반란의 여지를 만들어 준게 실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우랑제브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자기 어머니 묘 타지마할을 조성하면서 막대한 예산이 들어갔으므로 자신이 죽은 후에는 자기 무덤에 절대로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즉 규모가 작은 무덤을 만들라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그의 무덤은 당시의 왕 무덤보다 규모가 작고 소박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지붕도 없으니 어머니 묘와는 다르게 비가 오면 그대로 비를 맞는 그런 무덤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무굴제국은 지리멸렬해 졌습니다. 힌두교도, 시크교도들의 반란과 서양세력의 침입으로 무굴제국은 결국 멸망의 길로 떨어집니다.


무굴제국은 인도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교묘히 혼합되어 문화를 발전해 나갔습니다. 인도 전통종교인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혼합한 새로운 종교인 시크교가 탄생되었으며 건축 양식도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요소가 곳곳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들은 우르드어도 사용하였는데 이 언어는 이슬람 국가에서 온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그리고 튀르크어가 혼합된 언어였다고 합니다. 즉 다른 문화와 토착 문화를 잘 섞어 발전한 무굴제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몰락


조세핀과 에메 뒤비크는 서로 사촌지간입니다. 에메 뒤비크는 1763년 출생하는데 어려서 부모가 죽자, 삼촌에게 맡겨져 조세핀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같이 지내며 사촌간이지만 친자매처럼 다정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에메 뒤비크는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가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오스만제국 하렘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하렘이란 황제의 후궁들과 시녀들이 거처하는 금남의 구역이었으며 여자들이 한번 들어오면 하렘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황제의 선택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메 뒤비크는 압둘 하미트 1세의 선택을 받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마흐무트 2세였는데 나중에 오스만 제국의 황제가 됩니다. 수도원으로 가다가 팔려와서 일약 오스만제국 황제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조세핀은 물론 아다시피 나폴레옹과 결혼을 하지요.

오스만 제국의 황제가 된 마흐무트 2세. 하지만 즉위 초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에 에메 뒤비크는 사촌동생 조세핀에게 SOS를 칩니다. 조세핀은 나폴레옹을 부추겨서 오스만제국으로 들어가 반란군을 무찌릅니다. 이렇게 하여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는 아주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나폴레옹은 영국과 지난한 싸움을 합니다. 그러다가 대륙봉쇄령을 내립니다. 즉 영국과 유럽 여러나라 간의 무역을 금지하여 영국을 봉쇄하고 경제적 타격을 가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이 대륙봉쇄령을 효과적으로 가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영국은 목재를 러시아에서 대부분을 수입했기에 러시아가 협조만 해 준다면 영국에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당시 목재는 생활용품에 필요하지만 전쟁에도 중요한 물품이기 때문에 러시아를 끌여 들인 것입니다.

러시아도 처음에는 대륙봉쇄령에 긍정적이었으나 상인들이나 귀족들의 반대로 영국과의 무역을 재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혹한, 러시아 원정 시 넘어야 하는 산악지대 등의 이유로 프랑스 국민 대다수는 러시아 원정길을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강력하게 추진을 합니다. 일단 러시아는 오스만제국과 전쟁 중이기 때문에 쉽게 정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지요. 또 프랑스와 오스만제국과는 친분관계도 있으니 러시아 원정을 성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였습니다.


드디어 나폴레옹은 원정 군대를 꾸려 러시아로 갑니다. 하지만 이때 오스만제국과 러시아가 휴전을 맺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가 전개된 것입니다. 러시아는 오스만제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으니 온 군대를 프랑스와의 싸움에 투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전쟁 결과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대패를 당합니다.(64만명 중 62만명이 전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전쟁의 책임을 물어 황제에서 쫓겨나 엘바섬에 유배당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여기에서 나폴레옹은 생각합니다. 도대체 오스만제국이 왜 러시아와 휴전협정을 맺었을까?

 '오스만제국이 휴전협정만 맺지 않았어도 승산은 내게 있었는데...'

원인을 찾지 못해 답답한 마음뿐이었습니다.


휴전 협정의 이면에는 에메 뒤비크라는 여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오스만 제국 황제의 어머니입니다. 에메 뒤비크는 나폴레옹이 한 짓에 분노하여 프랑스의 숙적이었던 영국과도 손을 잡고,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길에 오르자 러시아와도 전쟁 그만하자고 휴전을 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왜 에메 뒤비크가 분노했을까요?

그것은 자신과 어렸을 때 친자매처럼 지냈던 조세핀, 오스만 제국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도와준 조세핀. 그런 조세핀을 나폴레옹이 강제 이혼해 버린 것에 분노하여 나폴레옹에게 처절한 복수를 안긴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황녀와 정략결혼을 하기 위해 조세핀을 이혼녀의 신세로 전락시킨 나폴레옹을 에메 뒤비크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었지요.


아! 여자가 한을 품으면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에메 뒤비크였습니다. 



<트레드밀을 만들다>

1800년대 초 영국에서는 죄를 지으면 교도서에 수감하였는데 형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1. 사형 또는 국외추방

2. 평생 교도소에서 수감되기

교도소의 환경이 워낙 좋지않고 가혹하였기 때문에 사형이나 국외추방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죄수들은 사형 당하는 것보다는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평생 교도소에서 생활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렇다보니 교도소는 많은 죄수들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죄수들이 얌전히 있으면 좋으련만 난폭한 죄수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도관들은 그들을 통제하느라 애를 먹곤 했습니다. 

그래서 기술자였던 윌리엄 큐빗에게 부탁을 합니다.

"난폭한 죄수들때문에 미치겠어. 전혀 통제가 안돼. 뭔가 획기적인 방법이 없을까? 죄수들이 노동도 하고, 통제가 잘 될 수 있는 어떤 기구를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기구라...음.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죄수들을 위한 멋진 기구를 만들어주지."

그리하여 그는 바퀴 형태로 돌아가는 기구를 만들게 됩니다. 이것은 계속 밟아야만 돌아가는 기구로 죄수들은 끊임없이 밟아야 되고, 기구가 돌아가면서 물레방아처럼 곡식을 찧을 수 있도록 고안된 기구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죄수들이 노동을 해야 한다는 법을 따를 수 있었고, 말 안듣는 죄수들에게는 공포의 고문기구가 되었습니다.

죄수들은 그냥 밟으면 된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애들 장난감처럼 생각하다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엄청난 고통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수들은 그것을 고문도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매일 6시간씩 트레드밀을 밟다 보면 변화 없는 단순함에 미칠 지경이 되었지요. 처음에는 그나마 옆 죄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칸막이를 설치하여 아무 말도 못하게 하며 트레드밀을 밟게 하였습니다. 완전 분리된 공간에서 죄수들은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힘이 들어 "차라리 죽여달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제 죄수들이 통제가 되지 않을 때 교도관들은 

"어이! 거기 두사람. 그거 타고 싶어! 앙"

이렇게 말하면 죄수들은 금방 공손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죄수들이 고분고분해지자 영국 각지의 교도소에서 트레드밀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트레드밀이 죄수들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경범죄나 중범죄 모두 똑같은 수감 생활을 시켰고, 교도소에 수감되면 동일한 형벌을 받아야 했으므로 트레드밀도 똑같이 밟아야 했지요. 즉 경범죄나 중범죄자 형벌이 공평하지 못하고 매우 가혹하다는 여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감자들의 인권을 위하여 1898년 교도소법 제정으로 이 기구의 사용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형벌도구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독일에서 스트롱맨쇼를 진행하던 루이스 아틸라. 이 사람은 자신의 하체근력을 키우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운동기구가 뭔가 있을까?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그는 영국에 있었던 형벌도구를 알게 됩니다.

"이게 형벌도구라고....계속 계단을 올라가야 한단 말이지. 음. 그러면 하체 근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겠군."

이렇게 생각한 그는 트레드밀을 운동기구로 탈바꿈시킵니다. 그리하여 개량에 개량을 거쳐 현재 런닝머신이라고 알고 있는 헬스장의 운동기구가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런닝머신은 콩글리쉬입니다. 정확한 표현은 트레드밀(Treadmill)입니다.

Tread - 밟다,  Mill-공장, 곡식을 가는 기구 

즉 밟는 공장, 밟아서 곡식을 가는 기구 란는 뜻이 됩니다.

옛날 고문기구가 현재 헬스장에서 다이어트를 위해 열심히 달리는 운동기구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헬스장에서 하는 것도 좋지만 산에 올라 좋은 공기를 마시며 트래킹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트레드밀 또는 트래킹 해서 뱃살을 빼자....

<얀 네포무크 신부와 왕비의 고해성사>

지난 번 카렐교(카를교)에 대해 포스팅했는데요.
얀 네포무크가 왕비로부터 어떤 고해 성사를 들었기에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켜주었을까요?
체코 프라하 성 앞 블타바 강위에 놓인 카를교...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붐비는 곳인데요. 관광객들이 카를교에 와서 꼭 하고 가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소원을 비는 일입니다. 바로 얀 네포무크의 조각상앞에서 소원을 빕니다. 그래서 얀 네포무크의 조각상 앞 동판은 사람들의 손길이 많이 닿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습니다.

이 동판은 얀 네포무크가 카를교 다리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새긴 것인데요. 얀 네포무크가 떨어지기 전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 마지막 소원을 이 다리에 바치나니 이 다리에 선 자는 모두 소원을 이룰 것이다."

때는 1393년. 얀 네포무크는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알고 싶어하는 보헤미아 국왕인 벤첸슬라우스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얀 네포무크 신부, 말하라! 그날 왕비가 신부에게 무슨 고해 성사를 했는지 당장 말하라."
"전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고해성사 내용은 오직 하느님만 아시는 것입니다."
끝까지 왕비의 고해성사를 말하지 않은 얀 네포무크.

그렇다면 고해성사의 내용은 무엇일까?

왕비는 왕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늘 외로운 왕비.
"외로워 외로워 바람처럼 외로워. 서러워 서러워 ~~~"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전쟁터로 나간 사이 왕비는 루드비크 장군과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왕비는 죄책감으로 이런 내용을 얀 네포무크 신부에게 고해성사하고 죄를 사면받고자 합니다.
얀 네포무크는 고해성사의 내용을 끝까지 비밀로 한다고 왕비에게 약속을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누설하는 것을 엄히 금지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 왕은 전쟁터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때 한 시녀가 찾아와 왕비와 장군과의 염문을 발설합니다.
하필 그 장면을 시녀가 본 것입니다.
"뭐라! 왕비가 그런 일을...그 장군이 누구냐?"
"전하. 뒷모습만 봐서 어떤 장군인지 잘 모릅니다."
"이런 요망한 것. 만약 거짓이라면 넌 목숨을 잃을 줄 알아라."

왕비의 비밀을 알게 된 왕은 크게 분노하며 왕비를 다그치지만 왕비는 전혀 그런일이 없다고 해야 되겠지요.
왕비는 안그랬다고 하고 그러니 시녀를 고문하고 처형합니다.
왕은 그래도 왕비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왕비가 고해성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얀 네포무크 신부를 모진 고문을 하며 고해성사 내용을 말하라고 다그칩니다.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고해성사 내용을 말하지 않는 얀 네포무크...
이성을 잃은 왕은 이제 얀 네포무크를 묶어 카를교 아래 블타바 강으로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그후 얀 네포무크는 고해성사의 비밀을 지키고자 목숨까지 버린 순교자.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수호자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얀 네포무크가 처형당한 카를교 난간에 십자가 표식을 만들었고 동상을 카를교에 세웠는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데요. 얀 네포무크 동상앞에서 소원을 빌면 모두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아마 얀 네포무크가 다리에서 떨어지기 전에 한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이 다리에 가면 얀 네포무크의 동상 앞에서 동판을 만지며 소원을 빌고 있습니다.
저도 우리 가족의 건강을 빌고 왔는데 이루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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