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백제, 신라는 일본과 교류하면서 뛰어난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6세기 일본 야마토 정권 수립과 7세기 아스카 문화 형성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구려 문화의 일본 전파

- 담징은 호류사 금당벽화를 그렸으며, 종이, 먹, 맷돌 제조법을 알려주었습니다.

- 혜자는 백제의 혜총과 더불어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 일본의 다카마쓰 고분벽화는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수산리 고분벽화는 치마 입은 사람은 크게 그리고, 우산(양산)을 받쳐주는 사람은 작게 그렸습니다. 사람을 크게 또는 작게 그린 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신분제 사회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벽화입니다. 다카마쓰 고분벽화에는 여성의 옷차림과 머리를 묶은 모습이 고구려 사람과 비슷하게 그렸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계 사람이 다카마쓰 고분벽화를 그린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확실한 사실은 벽화에 나오는 인물이 수산리 고분과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다카마쓰 고분벽화는 수산리 고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는 백제, 신라, 가야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백제 문화의 일본 전파

- 백제는 일본(왜)와 활발한 교류를 하였습니다. 특히 일본 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 아직기와 왕인은 일본에 한자와 천자문을 전해 주었습니다. 아직기는 학문에 능하여 일본 왕이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 왕이 백제에 또 뛰어난 학자가 있는지 물어보자 왕인을 추천하여 백제왕에게 왕인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렇게 일본에 파견된 왕인은 근초고왕때 유학자로 일본 오진 천황의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논어 등 유학도 전파하였습니다. 

- 성왕때 노리사치계는 일본에 불경, 불상 등 불교를 전파하였습니다.(552년)

- 백제 가람 양식, 호류사 백제 관음상, 고류사 목조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등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습니다.

신라 문화의 일본 전파

- 조선술과 한인의 연못이라고 불리우는 저수지가 조성될 수 있도록 축제술을 전파하였습니다.

가야 문화의 일본 전파

- 철 생산 기술을 전파하였습니다.

- 토기 제작 기술을 전파하여 일본 스에키 토기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통일 신라 문화의 일본 전파

-금속제품, 직물 등을 수출하고 불교와 유교를 전파하였습니다.

- 특히 7세기 후반부터 8세기에 융성한 하쿠호 문화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공포는 목조건축물에서 처마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만듭니다.

공포의 대표적 양식으로는 주심포 양식, 다포식, 익공식 등이 있습니다.


주심포양식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형식으로 가장 오래된 형태입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예산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조사당, 강릉 객사문, 

 안동 봉정사 극락전, 강진 무의사 극락전 등이 있습니다.

-건축물의 화려함보다는 정갈하고 단아한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다포식

-기둥 위에 공포가 있고, 또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놓는 형식입니다.

-주심포보다 훨씬 화려하고 격이 높은 형태라고 생각하여 주로 궁궐의 정전이나 

  사찰의 법당에 많이 쓰이던 양식입니다.

-다포식 양식은 주로 조선시대 건축물에 나타나는 형식으로 

 황해도 심원사 보광전, 완주 화엄사 각황전, 경주 불국사 대웅전, 법주사 팔상전 등이 있습니다.


익공식

-주심포 양식인데 공포의 모양을 새의 날개 모양으로 장식하는 형식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조선의 독특한 형식으로 

  17세기 이후 소규모 건축물에 대부분 익공식으로 지었습니다.

-다포식은 화려함으로 크고 웅장하며 격이 있는 건물에 적용되었으나 

 익공식은 관아, 향교, 서원, 지방의 상류 주택들이 익공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발해는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들이 함께 건국한 나라입니다. 대조영이 나라의 근거지는 동모산, 초기 이름은 진, 698년에 건국하였다가 발해로 국호를 바꿉니다. 이때 연호는 천통이었습니다.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었습니다. 

 말갈인은 고구려 때부터 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 만주족으로 불리웠는데 우리나라와 참 밀접한 민족입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만주를 우리 민족이 계속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자신들의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고구려 계승 근거는 뚜렷합니다.

 우선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낼 때 <고려국왕-고구려국왕>이라고 칭했습니다. 발해 지배층 대부분이 고씨와 대씨였으며, 고구려 문화와 유사한 유물과 유적들이 있습니다. 또 발해 멸망 후에는 왕자 대광현 등이 중국에 귀화하지 않고 고려로 넘어왔습니다. 왕건은 대광현을 후한 대접을 하며 맞이하였지요. 이런 여러 가지 근거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대왕 무왕과 3대왕 문왕은 일본에 국서를 보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무왕은 당과 대립하였으나 문왕은 당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며 당문화를 수입하고, 유학생도 보냈습니다. 또 발해관에서 금, 은, 모피, 말 등을 수출하며 활발하게 당과 무역을 하였습니다.


 10대 선왕 때에는 지방제도가 5경 15부 62주로 완비되고, 동쪽의 문화와 국력이 성대한 나라로 해동성국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중국에서 보면 발해가 동쪽이니 해동성국입니다.

 하지만 발해의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발해 멸망도 확실한 내부 기록은 없는 듯 합니다. 다만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기록을 보면 발해의 내부에서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손쉽게 이겼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아마 지배층인 고구려 후예들과 피지배층인 말갈인과 뭔가 모를 불협화음, 지배층 내부에서 권력 투쟁의 격화 등으로 나라의 힘이 약해져 있을 때, 당이 멸망한 후 세력을 팽창하던 거란에 의해 망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때가 926년입니다.

 발해가 멸망한 후 우리 민족은 만주에서 더 이상 세력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저술한 <발해고>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하며 만주 지역에 관심을 드러냈습니다. 고려가 발해의 역사를 저술하지 않은 것에 대해 큰 불만을 나타나며 남북국시대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발해를 세운 사람이 대씨이고 고구려인이니 발해의 역사는 바로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발해를 꿈꾸며라는 노래를 통해 발해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남북한의 평화적인 통일을 통한 발전을 염원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늦은 나이인 41세에 낳은 아들이고, 너무나 총명했던 아들이어서 영조가 아주아주 사랑한 아들입니다. 3살 때 한문을 깨쳤다고 하니 그의 총명함에 영조의 기대는 아주 컸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성장하면서 학문보다는 무예를 숭상합니다.

영조는 스스로 엄격하며 학문을 좋아했는데 세자는 그런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합니다.

세자는 엄격한 영조 밑에서 반항심이 생깁니다.

부자간의 갈등을 갈 수록 심화되고 세자의 정신병적 증상이 심화됩니다. 

아버지 영조를 죽이겠다고 횡설수설하는 등 영조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울화증과 정신병이 있어 궁중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데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는 내시의 목을 잘라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목을 들고 미친듯이 동궁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자가 처단한 사람이 백여명. 세자의 비행이 임금의 귀까지 들어가게 되고 또 어머니 영빈이씨가 말하길 사도세자가 전하를 죽이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닌다고 하며 세자의 처리를 상신합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합니다. 한여름 뙤약볕 더위에서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조금씩 생명이 꺼져갑니다.


그때 세자가 밖에 대고 소리칩니다.

사도세자: 밖에 누가 있느냐?

포도대장: 구선복이 있습니다.

사도세자: 네이놈! 어찌 이리도 무엄한가? 이름만 말하고 왜 직함을 말하지 않는가?

포도대장: (겁나 거만하게) 아참 나. 나 포도대장 구선복입니다. 왜그러는데요. 도대체...

이렇게 구선복은 세자에게 오만방자하게 대하고 심지어 세자는 뒤주 속에서 굶어가며 생이 꺼져가고 있는데 그 옆에서 음식 냄새 풍기며 음식을 쩝쩝 먹었습니다. 당시 정조의 나이 11살.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였으나 영조는 냉정합니다. 

정조는 그 원한을 아직 표출하지 못할 나이이므로 속으로 삭힙니다.

사도세자가 폐서인 되어 죽으니 아들 이산 또한 폐서인이 되어야 할 운명입니다.

그러나 궁궐에는 영조 다음에 보위를 이을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산을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킵니다.

영조때 집권당은 노론이었고 야당은 소론이었습니다.

집권여당 노론은 영조에게 의탁하여 정치활동 전면에 나섰으나

비집권 야당인 소론은 사도세자에 의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노론은 끊임없이 소론을 핍박하고 그 대표격인 사도세자를 살려 둘 수가 없었지요.

노론은 지속적으로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변하고, 사도세자를 뒤주 속으로 들어가게 한 배후는 노론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노론들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이 왕이 되는 것을 적극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영조가 죽고 뒤를 이어 왕위를 이어받습니다.

드디어 임금에 오르는 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렇게 자신을 반대하는 노론과 한번 붙어보겠다는 의지를 다집니다.

참 정조가 임금이 되었으니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버릇 없이 굴었던 구선복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구선복이 군권에 힘을 주고 있어서 정조는 즉위 초에 구선복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정말 너무가 원한에 사무치지만 힘이 없는 정조는 때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정조 10년에 구선복을 역모죄로 다스립니다.

구선복은 정조의 원한이 크므로 사약 같은 것을 받지 못하고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을 당합니다. 

정조가 임금이 될 수 있도록 크게 도움을 준 사람은 홍국영입니다. 그런데 그는 초심을 잃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남용하다가 정조의 제재를 받아 낙향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정조는 홍국영을 다시 부르지 않았으며 홍국영을 쓸쓸히 생을 마감합니다.


정조의 왕권 강화책

장용영 설치-경호부대, 군권 장악을 위한 막강 경호부대 창설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규장각 설치-문권 장악을 위한 규장각 설립-이곳에서 항상 정국 구상하였습니다.


정조의 업적

1. 탕평책 실시-시파 벽파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 등용

2. 규장각 설립-역대 왕들의 글, 글씨 등과 어진을 보관하던 왕실도서관 설치

3. 실학 중시-여러 실학자 정계 진출 지원

4. 장용영 설치-왕권 강화 친위부대

5. 서얼 등용-능력있는 서얼에게 정계 진출 허용

6. 수원화성 축조-거중기

7. 신해통공-금난전권 폐지, 상업의 자유화 도모

8. 초계문신제 실시-초계를 통해 등용시킨 당하관 관리 교육 실시

9. 서적 편찬-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추관지, 규장전운 등

10. 공장안 폐지-지방 관아에 속해 있는 공장들의 등록 장부를 폐기시킴



1441년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날은 1449년(?) 519일입니다.

그래서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발명의 날이 제정되었습니다.

비의 양을 알아내고 평균적인 강수량을 측정하는 것은 당시 농경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비의 양에 따라 풍년이냐 흉년이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각 지역의 비의 양을 측정하여 풍흉 여부를 알아보고 각 지역의 세금을 매기는 척도로 활용했지요.

그런데 측우기가 없던 시절에는 단순하게 땅을 파서 

땅에 얼마만큼의 빗물이 스며들었는지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토양의 성분에 따라 어느 지역은 빗물이 스며들어 금방 없어지고,

어떤 지역은 진흙으로 되어 있어 물기를 오래 머금었습니다.

비는 똑같이 오는데 같은 지역 내에서도 토질에 따라 비의 양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으니 

정확한 측정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세종의 아들 문종이

그러면 땅 속에 쇠로 만든 그릇을 넣어 두고 그 빗물의 양을 재면 되지 않을까요?”

라는 의견을 냈습니다.

그리하여 문종의 아이디어로 장영실을 비롯한 과학자들이 연구하여 

서양보다 200여년 앞서서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측우기를 이용하여 비가 얼마 내렸는지 측정하여 일년간의 강우량 분포를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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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계가 없다면 약속시간에 늦거나 학교에 늦게 가서 많은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시계가 없었던 옛날에는 어떻게 시간을 알았을까요?

우선 해를 이용한 해시계가 있습니다. 

앙부일구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조선시대에 인기가 많았고 사용하기 편리했습니다.

움푹 들어간 솥모양(가마솥 부 ) 같이 생겨서 시계판이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는(우러러볼 앙 仰) 해(해 일 日)의 그림자(그림자 구 晷)를 보는 시계입니다.

가운데 바늘이 영침으로 해의 그림자의 방향을 나타냅니다.

오목한 시계판 솥에는 가로세로로 많은 줄이 있는데, 

세로선은 현재 시각을 알려주고, 가로선은 계절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휴대할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들어 가지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점은 해가 없거나 비가 오면 전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물시계 즉 자격루입니다.

물이 차면 원통 속에 있는 잣대가 떠올라 구슬을 건드리면 굴러가서 큰 구슬을 건드립니다. 

큰 구슬이 움직이면서 정해진 시간에 종, 징, 북이 저절로 울리도록 고안되었습니다.

물이 일정하게  떨어지는 원리를 이용하여 정해진 시간에 스스로 부딪쳐 소리를 내어 시간을 알리는 자격루는 시각을 자동으로 알려줘서 사용하기 편리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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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왕권은 무열왕 직계 자손들이 왕위를 독점 세습하게 되었으며 시중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상대등을 약화시켰습니다. 시중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맡아보는 집사부의 장을 말하는데 경덕왕 까지는 중시라고 하였고 이후 시중이라고 불리웠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 진골 출신의 왕으로 감찰기관인 사정부를 두었으며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부모 모두 왕족이면 성골, 한 쪽이 왕족이면 진골입니다.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신문왕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가 있다고 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김흠돌의 반역을 잘 진압한 후 귀족들을 숙청하였습니다. 신문왕때 중요한 것이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였다는 점입니다. 관료전은 현직 관리들에게 지급하고 퇴직하면 반납해야 했습니다. 녹읍은 관료들에게 지급했던 것인데 해당 논밭에서 세금을 수취할 수 있었고, 노동력과 공물 등 모두 수취할 수 있었습니다. 녹읍을 지급하면 당연히 귀족들의 입김이 세졌지만 왕권은 약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녹읍을 폐지하면 귀족들에게 들어갈 세금이나 공물 등을 나라에서 수취하게 되어 왕권이 강화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신문왕은 또 지방 조직을 완비하여 9주 5소경으로 정비하였으며 군사조직도 중앙군은 9서당, 지방군은 10정으로 정비하였습니다.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하였고 필수 교과목으로 논어와 효경을 공부하였습니다. 성덕왕 때에는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고 경덕왕 때 귀족의 반발로 다시 녹읍이 부활되어 귀족들의 권력이 다시 강화되었습니다. 원성왕 때에는 새로운 관료 선발제인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과 골품제의 모순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또 웅주(지금의 공주 지방) 도독이었던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이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웅주에서 난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김헌창의 난은 진압되어 실패하였습니다. 

 신라 하대에는 촌주, 몰락한 중앙 귀족, 지방의 군사력을 가진 세력과 해상 세력 등이 호족이라고 불리우며 독자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스스로 성주가 되거나 장군이 되어 그 지역의 행정과 군사력을 장악하고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기도 하였습니다. 또 아무리 뛰어나도 고위직으로 진출이 어려운 6두품들이 골품제를 비판하고 유교 정치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수용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반 신라적인 사고를 하거나 지방 호족들과 힘을 합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6두품 학자로는 3최로 불리우는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등이 있습니다. 

 진성여왕의 실정과 거듭되는 흉년과 국가와 지배층들의 핍박으로 농민들은 몰락하였고, 농민들은 노비가 되거나 초적이 되었습니다. 원종과 애노의 난을 계기로 양길의 난, 기훤의 난 등의 농민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계속되는 혼란 속에서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입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견훤의 압박으로 신라는 국가의 위신이 없어지고 신라의 관리나 장군들이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자 경순왕도 나라의 존립이 어렵다고 생각하여 고려로 투항하였습니다. 하지만 태자였던 마의태자는 끝까지 반대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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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세력을 팽창하자 돌궐-고구려-백제-왜의 연합이 형성되었습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압박해오자 영양왕은 수의 압박에 대항하여 요서지방을 선제 공격하였습니다. 수문제는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왔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수 양제도 113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요동성 공략을 실패하자,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성에 보내 전투를 벌였으나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크게 무찔렀습니다. 을지문덕은 평양성 근처까지 쳐들어온 별동대에게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며 수의 군사를 살수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살수대첩입니다. 수나라는 무리한 고구려 원정과 대운하 건설 등으로 국력을 낭비하여 2대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수나라 멸망 후 중국에는 당나라가 들어섭니다. 당태종은 팽창정책을 추진하여 고구려를 또 넘봅니다. 고구려는 당의 침입에 대비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강경한 대당 정책을 펼칩니다. 그러자 당태종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해 오지만 안시성의 양만춘 장군에게 대패하고 물러났습니다. 이렇게 고구려는 당을 슬기롭게 막아내어 한반도 침략을 저지하였습니다. 

 한편 신라는 백제 의자왕이 대야성을 공격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죽고 40여개 성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여 당과 손을 잡을 방법을 모색합니다. 진덕여왕 때 딸과 사위의 원한을 어떻게든 갚고자 한 김춘추는 위험을 무릅쓰고 당나라로 건너갑니다. 마침 당나라도 고구려 공격이 실패한 터라 신라 김춘추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어 나당 동맹이 맺어집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약한 백제를 공격합니다. 백제는 계백이 황산벌에서 5천 결사대를 이끌고 막아서지만 중과부적으로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고 맙니다. 이후 백제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벌이지만 지도층의 내분으로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은 연개소문이 죽은 후 지배층이 분열된 틈을 타서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맙니다. 고구려 유민들도 부흥운동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까지 멸망시킨 당나라는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드러내며 웅진도독부, 계림도독부, 안동도호부 등을 설치하였습니다. 이에 신라는 대당 전쟁을 전개하여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당을 몰아내고 676년 삼국 통일을 완성합니다. 대당 전쟁에서는 비록 자신을 멸망시킨 신라이지만 당나라를 몰아내고자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들도 협력하였습니다. 삼국통일의 의이는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당의 야심을 몰아내고 자주성을 확립하였으며 하나로 된 국가에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한계와 만주지방의 영토를 잃어버린 채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까지였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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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경주 지역 토착민 집단과 이주민 집단이 결합되어 사로국에서 시작되어 발전해갔습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발전한 신라는 고대국가로 발전도 늦었습니다. 왕위도 박씨, 석씨, 김씨 등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가 내물왕 때부터는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신라의 왕호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왕으로 바뀌었습니다. 내물왕 때 왕의 칭호는 마립간이었는데 대군장이라는 뜻입니다. 백제와 왜의 공격을 받자 내물왕은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여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왜군을 축출하였으나 고구려의 내정 간섭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경주 한 고분에서 출토된 호우명 그릇에는 고구려와 신라 간의 교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내용과 고구려가 신라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간섭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눌지왕 때 백제의 비류왕과 나제동맹을 맺었으며, 고구려 묵호자가 불교를 전해주기도 하였지만 공인되지는 못했습니다. 소지왕 때에는 백제 동성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였습니다. 지증왕은 우경을 실시하고 순장을 폐지시키고 동시전을 설치하여 상행위를 감독하였습니다. 국호를 신라로 고치고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이사부를 시켜 울릉도를 복속하였습니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불교가 왕권 강화 및 중앙 집권을 위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상대등을 설치하여 국정을 총괄하도록 하였으며 김해의 금관가야를 복속하였습니다. 법흥왕은 독자적인 연호인 건원을 사용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신라 전성기를 이룩한 왕입니다. 독자적 연호인 개국을 사용하였고 거칠부로 하여금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도록 하였습니다. 화랑도를 정비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백제와 함께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다가 백제의 성왕과 전투를 벌여 성왕을 전사시켰습니다. 한강을 확보하여 당항성을 중심으로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었으며, 대가야까지 정벌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정복지마다 기념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진흥왕 순수비입니다. 단약적성비, 북한산비, 마운령비, 창녕비, 황초령비 등이 있습니다. 

 가야는 변한 지역의 풍부한 철과 벼농사를 토대로 발전하여 6가야가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김수로가 낙동강 유역에 세운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풍부한 철 생산과 해상교통을 바탕으로 중계무역을 통해 번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요청을 받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 금관가야는 쇠퇴하고 힘의 중심이 대가야로 옮겨갑니다. 대가야는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었는데 지금의 고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정치적으로도 불안하여,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신라와 백제에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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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위례성시대, 웅진시대, 사비시대로 나뉘어 집니다. 온조와 비류의 이야기가 있는 위례성에서 문주왕의 웅진천도까지 한강유역을 차지하며 발전해왔습니다. 고이왕 때 관제를 정비하고, 공복을 제정하고, 율령을 반포하고, 목지국을 병합하였으며, 한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하였습니다. 근초고왕 때 평양성을 공격하기도 하였고 이때 고구려 왕인 고국원왕이 전사합니다. 고국원왕은 백제와 전투 이전에 모용선비라는 강적과 싸우고 또 백제 근초고왕을 만나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전쟁터에서 죽은 고구려 유일한 왕이 되었습니다. 마한을 병합한 근초고왕은 요서, 산둥, 일본까지 진출하였습니다. 가야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왕위 부자 세습을 확립하였습니다. 침류왕때에는 동진에서 마라난타라는 사람이 백제로 와서 불교가 전래되었습니다. 비유왕때에는 신라의 눌지왕과 나제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비하였습니다. 개로왕은 북위에 국서를 보내 백제를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북위는 고구려와 싸울 생각이 없었고, 북위가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백제가 북위와 함께 고구려를 치려고 했던 것을 북위의 사신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백제 정벌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림이라는 스님을 백제에 첩자로 보내 백제를 정탐하도록 하였습니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궁궐에 들어가 바둑을 함께 두기를 청하였습니다. 개로왕은 좋은 바둑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하며 수시로 도림과 바둑을 두었습니다. 개로왕의 신임을 얻은 도림은 왕권의 위세를 높여야 한다고 하며 대규모 공사를 건의하였습니다. 도림의 말대로 대규모 공사를 벌여 나라의 창고는 비어져 갔습니다.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은 개로왕을 원망하였으며 때는 이때다 라고 생각한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하였ㅅ브니다. 그리고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기고 개로왕도 고구려 군에 의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하고 왕권은 많이 약화되어 귀족 들이 국정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동성왕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으며 무령왕 때 22담로를 설치하여 왕족을 파견, 지방을 통치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사비로 천도하였으며, 중앙 22부, 수도 5부, 지방 5방을 정비하였습니다. 불교를 장려하고 일본에 노리사치계라는 사람이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습니다. 중국의 남조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으며 나제동맹으로 고구려 세력을 몰아내고 일시적으로나마 한강을 되찾았으나 진흥왕에 의해 한강 유역도 빼앗겼습니다. 관산성 전투에서 왕자 창(위덕왕)이 고립되자 성왕이 직접 구하려 가다가 신라의 복병을 만나 기습을 당해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윤충으로 하여금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대야성주인 품석을 죽였습니다. 품석은 김춘추의 사위로 김춘추가 애지중지하던 딸까지 죽어서 김춘추는 백제에 대한 원한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다가 실패하고,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어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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