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참모총장도 마다하고 고국으로 돌아오다.>

최용덕 장군은 일제 강점기 국권 상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중국 군인이 되어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애를 썼지요. 만주에 있는 독립군 부대에 들어가서는 일본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서 항공기가 큰 역할을 담당하자 앞으로의 전쟁은 공군력에 있다고 보고 1920년에 중국공군학교에 진학하여 중국공군기지학교장까지 역임합니다. 한편으로는 의열단에도 가입하여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함께 하였습니다.

드디어 일본이 패망하였습니다. 일본 패망 후 공군참모총장의 자리를 맡아달라는 중화민국(대만)의 요청을 마다하고 1946년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앞으로의 전쟁은 공군이 핵심 전력이기에 우리나라에 공군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나라를 지킬 만한 쓸만한 군대가 없었습니다. 

'음, 어떡한다...전쟁이 일어나면 공군력이 절대적인데...'

미군정에서는 과거의 화려했던 중국군 복무 경력을 인정해 주지 않아 다시 군사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그는 공군 창설을 위해 쉰살의 나이에 이등병으로 육군보병학교에 입소하였습니다. 과거 중국에서의 화려했던 경력을 모두 버리고 아들뻘 되는 군인들과 땀을 흘리며 묵묵히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1947년 육군 소위로 임관되고 그해 다시 대위로 특진하여 육군항공기지 부대장이 되었습니다.(이때는 공군이 따로 없고 육군에 소속되었습니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1950년에는 6.25전쟁에도 참전하였습니다. 공군참모총장이 되어서는 비행기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결과 1953년 우리 손으로 설계한 <부활호>라는 국산 첫 항공기가 제작되기도 하였습니다.

1962년에는 체신부 장관을 역임하고, 1969년 8월 15일 <내가 죽으면 공군제복을 입혀 묻어달라>는 유언과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중화민국(대만)에서의 편안한 삶을 버리고 우리나라로 돌아와 고난의 길을 걸으며 공군 창설을 위해 애쓰신 최용덕 장군님의 나라사랑 정신은 우리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사후에 정해지는 묘호>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성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조선 27대왕들의 이름을 국사시간에 외웠던 경험이 대부분 있을 것입니다.  조선 왕들의 이름은 잘 기억하는데 고려나 삼국시대 왕들은 외우기가 어려운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노력 부족...아니면 조선시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가 높아서... 하여간 조선 시대 왕들의 이름에는 조, 종, 군이 붙습니다.

조선 왕들은 죽어서 왕의 이름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묘호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묘호란 왕이 돌아가신 후 왕의 공덕과 업적을 기리어 합당하게 붙이는 이름을 말합니다. 그리고 종묘에 모십니다.

생전에 임금의 이름은 외자였습니다. 세종대왕은 이도, 정조 이산 등등. 왕의 이름이 들어간 글자는 사람들이 사용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니 사용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이름은 외자이고, 그것도 잘 쓰이지 않는 글자로 이름을 지었지요. 

<조냐? 종이냐? 군이냐?>

그럼 지금부터 묘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창업지군의 칭호를 받는다.

  - 태조는 개국한 왕들의 묘호에 붙입니다. 고려의 태조 왕건, 조선의 태조 이성계(이성계의 외자 이름으로 이단)가 그 예가 됩니다.
  • 부자간 왕통을 계승하면 의 칭호를 받는다.

  • 세자가 아닌 자가 왕이 되면 의 칭호, 세자가 계승하면 의 칭호를 받는다.

  -세조의 예에서 세자가 아닌 수양대군이 왕이 되어 세조의 묘호를 받습니다.
  • 왕을 하다가 폐위되면 이라 칭한다.

  -연산군, 광해군
  • 공이 있는 왕에게는 , 덕이 있는 왕에게는 이라 칭한다.

  -조선 중기, 후기로 오면서 선왕의 이름을 높여 자신의 왕권 강화와 정당성을 높이고자 종 보다는 조를 더 높게 보고 선호하였습니다. 
예) 선종을 선조로, 영종을 영조로, 정종을 정조로, 순종을 순조로 묘호를 후대에 바꿉니다. 이유는 위에서 말했듯이 선왕의 이름을 높여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지요.
 조의 묘호를 받는 조선 국왕은 모두 7명인데(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그중 세조와 인조에게 조의 묘호를 부여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자가 아닌 사람이 왕위에 오른 이유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왕위 찬탈을 한 왕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백성의 이름은>

당시 사람들은 이름은 소중한 것이므로 함부로 불리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지어 주는 초명, 성년이 되기 전까지 부르는 아명을 지었습니다. 귀한 집 자식은 저승사자가 빨리 데려간다는 생각이 있어 양반가나 왕가에서는 천한 이름(개똥이 등)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남자가 성년이 되어 관례를 치르면 <자>를 지어 사용합니다. <자>는 동년배끼리, 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를때 흔히 사용합니다.

또 <호>라는 것이 있는데 위아래 구분없이 누구나 부를 수 있었고 작명도 자유롭게 지어 쓸 수 있었습니다.

여성과 일반 백성들은 태어날 때 지은 초명만을 사용하였습니다. 여성들은 결혼하면 김씨, 박씨 등으로 불리며 평생을 이름없는 사람으로 살아갔습니다.

오늘날에는 현실 세계에서는 이름을 사용하고, 가상 세계(인터넷)에서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지요.

이름은 사람의 정체성은 나타내는 중요한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이름이 좋아야 출세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절차가 복잡한데도 개명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태어날 때 부모님께서 주신 소중한 이름. 이 이름을 후세에 날리는 이름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이름에 걸맞게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을미사변 발생>

1895년 경복궁 옥호루에 난입하여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을미사변이지요. 

일본 낭인, 칼을 쓰는 깡패 같은 무뢰배 놈들이 일국의 왕비를 시해한 끔찍한 사건입니다. 

<치하포 사건>

이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후 황해도 치하포 나루터 주막에서 국밥을 조용히 먹고 있던 조선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국밥을 먹고 있던 그 순간 그는, 조선인의 복장을 하고 주막집으로 들어오는 한 일본 사람을 보았습니다. 치하포 나루터는 일본인이 원래 일본 옷을 입고 돌아다니던 곳이었는데 왜 조선사람 복장을 하며 돌아다닐까? 하며 의심을 하며 그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그런 의심을 하고 있던 찰나 조선 복장을 한 일본 남자가 칼을 지니고 있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니, 저 놈은 왜 굳이 조선 복장을 하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칼을 지니고 있을까? 저 놈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깡패놈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시해하고 여기로 도망한 놈 같구나. 만약 아니다 할 지라도 조선 복장을 하고 일본 칼을 가지고 다니는 놈은 언젠가 조선 사람을 해칠 것이다. 미리 손을 써야겠다. 내 저자를 죽여 국모를 죽인 원수를 갚아야겠다.'

슬쩍 일본 남자 앞으로 간 조선 사나이

"당신은 왜 조선 복장을 하고 다니시오. 그리고 그 칼은 또 무엇이오?"

"이런! 빠가야로!"

조선 사나이를 향해 칼을 뽑는다. 하지만 조선 사나이의 발길질이 벌써 일본 남자의 급소를 강타한다. 그리고 그 칼로 일본 남자를 처단한다. 그 일본 남자는 조선 사나이가 짐작한 대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했던 일본 장교 쓰치다 였습니다.

이 치하포 사건으로 조선 사나이는 인천 교도소에 투옥됩니다.

<임금님의 전화로 사형집행을 면하다.>

사형이 언도 되어 사형 집행날을 기다리는 조선사나이

'난 조선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의로운 일을 했기에 여기서 죽어도 원한이 없다.'

사형 집행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시점. 

"전하! 지금 인천 교도서에는 명성황후를 시해에 가담한 일본 장교 스치다를 처단한 조선 사나이가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뒤늦게 보고를 받은 임금은 급히 전화를 합니다. 이 전화기는 며칠 전 한양 궁궐과 인천 간에 개통되었던 전화기 였습니다.

"당장 그 조선인의 사형 집행을 멈추어라. 어명이다."

어명을 내린 이는 바로 고종이었고,

인천 교도소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조선 사나이는 김창수였습니다.

김창수가 누구인가?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백범 김구 선생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당시 한양 외 전화가 개통된 곳은 인천이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백범 김구 선생의 사형 집행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공식문서로는 남아있지 않고 백범일지에 기록되어 있어 스치다가 민간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육군 중위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김구를 옹호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스치다는 민간인이다.', 김구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스치다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이다.' 라고 주장하지요.

고종의 전화로 목숨을 건진 김구 선생은 그후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 독립운동을 위해 온 힘을 쏟았지요.

<봉보부인>

봉보부인은 조선시대 외명부 직첩의 하나로 종 1품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봉보부인이란 벼슬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조선시대 두서너살 밖에 되지 않은 세자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세자의 병이 걱정된 왕은 어의를 불러 병을 고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합니다.

어의가 임금께 아뢰자

"오호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당장 시행하도록 하여라."

어의들이 정성을 다해 탕약을 만듭니다. 그 탕약을 세자에게 직접 먹여야 효과가 클 것인데 세자는 나이가 너무 어려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마시는 여인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세자의 유모였습니다. 

어의가 임금께 아뢴 방법은 유모가 탕약을 마신 후, 세자에게 젖을 물리면 탕약의 성분이 젖을 통해 세자에게 전달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자가 아프면 온갖 좋은 약재가 들어간 탕약을 먹고 몸이 건강해진 상태에서 젖을 물릴 수 있는 특권이 유모에게 있는 것이지요. 어찌 탕약뿐이었겠습니까? 각지에서 한양으로 올라온 특산물이나 맛있는 건강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요?

유모의 건강이 세자의 건강과 직결된다고 생각하였으니 유모의 건강을 위해 매우 많은 특별대우를 해 주었습니다.

왕과 동급인 식사와 특별한 보양식 천국이 따로 없겠지요.

하지만 마냥 좋은 것만 아니었겠지요.

유모는 젖이 잘 나오고 행실이 좋은 집안의 여자를 뽑았는데, 유모로 일단 뽑히면 자기 자식은 내팽겨치고(?) 오직 세자나 왕손을 위해 일을 하고 젖을 물립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자식이 아프거나 죽을 수도 있고 집에도 가지 못하니 얼마나 자기 자식이 보고 싶었겠습니까?

하지만 자신이 젖을 물리고 보육한 세자가 왕이 된다면 더 큰 혜택이 주어집니다. 

바로 종1품의 봉보부인으로 봉해 지는 것입니다. 종1품이니 판서보다 높은 품계를 받는 것입니다.(판서는 정2품) 

또 왕은 자신을 키워 준 유모(봉보부인)를 극진하게 대접합니다. 종1품에 해당하는 녹봉은 당연히 지급되고 노비, 말, 곡식을 하사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봉보부인의 남편과 자식에게도 거기에 걸맞는 높은 벼슬을 주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사람들은 봉보부인에게 줄을 대어 뭔가 해보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문제점이 발생하여 조선왕조실록에는 봉보부인에 관련된 일로 임금께 간한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부인들은 남편의 품계에 따라 여성들의 품계도 달랐습니다. 하지만 봉보부인은 남편의 지위와 상관없이 자신의 공로로 품계를 받은 여성이지요. 

봉보부인이 죽으면 조정에서는 예를 다하여 장례를 지내 주었습니다. 임금은 봉보부인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지요. 

어찌보면 자신을 키워 준 유모에 대한 보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봉보부인의 품계를 받은 후에는 날파리들이 여기저기서 달려들었지요. 권력에 아첨하여 한 밑천 잡으려고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거란과 몽골의 침입에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하여 새긴 초조대장경과 팔만대장경은 고려인의 뛰어난 목판인쇄술을 보여줍니다. 특히 팔만대장경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신선의 필체"라며 감탄했던 유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팔만대장경이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한줌의 재로 변할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영환 장군의 항명으로 소중한 우리 민족의 유산이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영환 장군에게 내려진 명령>

 때는 한국 전쟁 중 1951년 8월에 공군 대령이었던 김영환 장군에게 명령이 떨어집니다.

 "당장 가야산에 숨어 들어간 인민군들을 소탕하시오. 약 900여명의 빨치산들이 가야산에 숨어 있으니 다시는 밖으로 나올 수 없도록 은둔지를 폭격하시오. 알겠소!"

명령을 받은 김영환 장군은 즉각 편대를 이끌고 폭격지점으로 날아갑니다. 그런데 폭격 명령이 떨어진 곳이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해인사와 장경판전이었습니다. 

"아니! 저곳은 해인사 장경판전이 아닌가? 빨치산 몇 명 때문에 소중한 문화유산인 저곳을 폭격해야만 하는가?"

명령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 마음 속으로 심한 갈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결정을 내린 후 마침내 편대를 돌립니다. 빨치산 몇 명 소탕하기 위해 소중한 우리 문화 유산을 파괴할 수 없다는 그의 신념때문이었습니다.

항명으로 인하여 결국 그는 상부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익스피어와 인도 모두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유물>

"영국 사람들은 세익스피어와 인도 전체를 바꿀 수 없다고 말을 합니다. 해인사 장경판전에 있는 팔만대장경은 세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준다 하더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전쟁중이라 할지라도 소중한 보물을 함부로 파괴할 순 없었습니다."

이렇게 항명 이유를 이야기 합니다. 상부에서도 그의 뜻을 이해하고 그를 계속 공군에 근무하게 합니다. 공군에서 많은 공을 쌓은 그는 1954년 3월 5일 공군 제10전투비행단 창설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사천기지를 떠나 강릉기지로 향하던 중 기상악화로 동해안 묵호 상공에서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한 공군 장교의 순간적인 기지로 우리 조상의 훌륭한 문화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들도 김영환 장군처럼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에서 가장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

<인왕제색도의 탄생 배경>

인왕제색도는 겸재 정선(1676-1759)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배경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겸재 정선의 어렸을 때 친구는 이병연이었습니다. 이병연(1671-1751)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시인입니다. 이병연과 정선은 어렸을 때부터 아주 친한 친구로 붙어 다녔습니다.

정선과 이병연은 지붕에 올라가 인왕산을 바라보며 놀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것 어른이 되어 정선은 도화서에 들어가 그림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데도 두 사람은 시간만 나면 경치 좋은 산을 다니며 정선이 그림을 그리면 이병연은 거기에 시를 지었습니다. 때로는 이병연이 시를 지으면 정선이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지요. 이렇게 수많은 그림과 시를 그려가며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어느덧 두 사람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병연은 병에 걸렸습니다. 정선은 가장 믿고 의지하던 친구가 앓아눕자 이병연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로 합니다. 바로 어렸을 때 이병연과 함께 바라보며 놀던 인왕산을 그리기로 한 것입니다.

인왕제색도 오른쪽 아래에는 조그마한 집이 나옵니다. 이집이 바로 병마와 싸우고 있는 이병현의 집 취록헌입니다. 비 온 뒤 인왕산의 모습을 그리고, 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잘 포착하여 그렸지요. 이 모습은 바로 비구름이 개듯 이병연이 병마를 물리치고 씻은듯이 낫기를 바라고, 인왕산처럼 당당하게 다시 정선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입니다.

정선의 혼을 담은 <인왕제색도>를 친구 이병연에게 보여주며

"여보게, 친구여, 어서 빨리 이 그림의 인왕산처럼 병마를 이겨내게나!"

"고맙네. 내 꼭 다시 일어남세."

인왕제색도는 그 동안 중국의 화풍을 모방하여 그린 그림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진짜 자연과 풍경을 보고 그린 진경산수화입니다. 

<정선의 작품들>

경교 명승첩이란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정선이 그림을 그려서 보내면 이병연을 시를 써서 화답하였지요. 이렇게 두 사람이 만든 여러 개의 시화를 엮은 것이 경교 명승첩입니다.

정선의 또 다른 대표작 금강전도도 있습니다. 정선은 늘 금강산을 그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때 마침 이병연이 금강산 근처의 현감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이때 이병연이 정선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정선은  금강산을 살피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는데 이때 탄생한 명화가 금강전도 입니다.

<우정을 키우자>

이렇게 정선과 이병연은 친구로서 우정을 가꾸고 실천하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저도 친한 친구가 몇 명 있었는데 지금은 연락도 자주 못하는 사이가 되버렸습니다.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정선과 이병연처럼 깊은 우정을 키워 나가지 못해 아쉽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자주 안부문자라도 주고 받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안장왕이야기>

고구려 22대왕 안장왕의 이야기입니다.

문자명왕의 장남인 안장왕은 이름이 흥안이었습니다. 

백제 개백땅(현재 고양시)은 한강일대를 지배하는 군사적인 요충지였습니다. 이곳은 고구려 땅이었는데 백제의 동성왕과 무령왕의 활약으로 고구려 땅인 개백(고양시)을 백제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아리따운 여인 한주를 만나다>

흥안은 늘 이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떡하면 개백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래 내가 직접 백제에 가서 개백의 상황을 파악해야겠어'

흥안은 이렇게 태자 시절 백제의 개백땅에 몰래 잠입하여 물건을 파는 보부상 행세를 하며 개백의 사정을 살피러 갔습니다. 그렇게 하루이틀 물건을 팔고 개백땅을 정탐하다가 어떤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오, 이렇게 예쁜 여인이 개백땅에 살고 있었다니..."

흥안이 한눈에 반한 그 여인의 이름은 <한주>였습니다. 흥안은 한주를 사랑하게 되고 한주도 그런 흥안이 싫지 않았습니다.

둘이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낮에는 보부상 흉내를 내며 개백의 이곳저곳을 살폈습니다. 시간이 어느덧 흘러 흥안이 고구려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 흥안은 사실을 말합니다.

"한주, 난 고구려의 태자 흥안이요. 실은 백제에게 빼앗긴 개박을 되찾기 위해 염탐하러 이곳에 온 것이요. 신분을 감추고 그대에게 접근한 게 미안하오. 어쩔 수 없었소. 하지만 내 반드시 당신을 데리러 다시 올것이오. 그때까지 날 기다려 주겠소?"

그렇게 흥안은 고구려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한주의 미모에 반한 개백 태수가 한주에게 청혼을 합니다. 

"아니되옵니다. 저는 이미 정혼한 사람이 있사옵니다."

"뭐야! 그 사람이 누구냐?"

한주는 고구려의 태자가 정혼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태수는 자꾸 싫다고 하는 한주를 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태수의 생일날이 되었습니다. 태수의 생일 잔치는 거나하게 차려졌습니다. 악공들을 비롯한 광대패들이 분위기를 띄웁니다. 이때 태수는 한주를 불러냅니다.

"자! 지금도 내 청혼을 받아들일테냐? 아니면 죽음을 받겠느냐?"

"전 죽음을 받겠나이다."

"뭐라. 요망한 년. 여봐라. 저 년의 목을 쳐라."

<한주를 구출하다>

칼을 들고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한주의 목을 베려는 사람이 아니라 개백 태수를 노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고구려 장군 을밀과 군사들입니다. 광대패로 위장하여 분위기를 띄우다가 한주를 구한 것입니다.

을밀도 개백에 오기 전 안장왕에게 한주를 구해오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성공하면 큰 상보다 안장왕이 여동생 안학공주와 결혼하고 싶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안장왕은 사내대장부다운 을밀이 한주도 구해오겠다고 하고,안학공주와도 혼인하고 싶다니 내심 너무 좋아했지요.

한주를 구한 을밀은 안학공주와 결혼하고, 안장왕은 한주를 고구려로 데려가 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장왕은 나중에 안타깝게 피살되었다고 하니 재위 기간동안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기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왕후도 한주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안장왕 시기의 정확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네요.

<춘향전의 모태가 되다>

춘향전은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이야기인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춘향전의 모태가 안장왕과 한주 여인이라는 것을 저도 이 이야기를 읽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춘향전은 안장왕과 한주 여인을 조선시대의 실정에 맞게 조금 다르게 꾸며 정리한 이야기인 것이라고 합니다.

김용환이 누구일까요?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어렵게 살고 있는 모습이 매스콤에서 볼때면 가슴이 아립니다. 그들의 부모나 선조들도 잘 사는 집안이었을텐데 재산을 몽땅 독립운동에 쏟아부었으니 말입니다. 

오늘은 독립운동가 중 김용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실은 저도 김용환 선생이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을 알게 된 후 '와! 이런 분도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김용환은 1887년에 태어나 광복 이듬해 1946년에 돌아가십니다. 김용환은 어려서 착실했지만 어느 순간 흥선대원군처럼 파락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안을 말아먹을 놈이 나왔다고 수근거렸습니다. 퇴계의 제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김성일의 명문가 집안에 왜 저런 사람이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기간에 노름판에서 날밤을 새는 김용환.

노름판에서 재산을 탕진하던 김용환.

시집 간 딸의 돈마저 탕진

시집 간 외동딸이 시댁에서 받은 돈(농 살돈)을 가지고 노름판에서 탕진하여 외동딸은 큰어머니가 쓰던 헌 농을 가지고 신행길에 올랐을 정도로 노름에 미쳐 있던 파락호였습니다.

김용환은 노름을 이렇게 합니다. 노름을 계속하다가 노름이 파하기 직전 막판에는 승부수를 띄웁니다. 가지고 있던 판돈을 모두 걸어 노름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돈을 따면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집으로 가지만, 돈을 잃으면 한 마디를 외칩니다.

"새벽 몽둥이!!!"

그러면 그의 아랫사람들이 노름판을 덮쳐 판돈을 챙겨 유유히 떠납니다.

돈을 따면 조용히 떠나고, 돈을 잃면 노름판 판돈을 강탈해 가는 것이지요. 지금으로 말하면 완전 불량배, 깡패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노름판에서 대대로 이어온 종갓집과 전답 등 전 재산을 다 날립니다. 아마 현재 시가로 200억~300억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1946년 한많은 이 세상과 작별을 합니다.

밝혀진 진실

그러나 그는 단순 노름꾼이 아니었음을 시간이 지나 밝혀졌습니다. 노름으로 탕진했다는 그의 재산은 만주의 독립군 자금으로 보내졌습니다. 일제의 눈과 귀를 속이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감시의 눈을 피한 후 독립군에게 자금을 보낸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그는 이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김용환이 어렸을 때 그의 할아버지가 사촌이었던 의병대장 김회락을 숨겨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발각되어 왜경에게 온갖 치욕을 당했습니다. 이를 목격한 김용환은 굳게 결심합니다.

  "나는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살겠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철저하게 자신을 숨겼습니다.

그가 세상과 이별하기 전 그의 오랜 친구가 말을 합니다.

 "이보게, 자네. 이제는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 이승의 짐을 풀고 가게나."

 "허허. 이사람아. 나는 조선의 선비야. 선비가 선비다워야지. 나는 선비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뿐이네. 너무 염려 말게나."

결국 이렇게 돌아가셨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그렇게 애쓰셨던 김용환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1592414. 임진왜란 발발로 조선땅은 아비규환으로 현장으로 변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정벌하러 갈 테니 조선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하며 우리나라를 침입하였다. 생전 처음보는 무기인 조총으로 생전 처음보는 무기를 들고 나타난 왜군부대는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조선을 손쉽게 유린하였다.

그 왜군부대 중 조총부대를 이끌던 사야가

그는 조선의 문화를 동경하여 처음부터 투항을 결심하였다고 그의 저서 모하당술회록에 적어 놓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아내와 딸을 볼모로 조선에 출병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어쩔 수 없이 출병한 사야가.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이런 불합리하고 의롭지 못한 전쟁을 찬성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선진 문화의 조선을 동경하였으며 기회를 틈타 조선에 귀화하리라 마음 먹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자신의 병사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조선인 모녀를 목격하게 된다.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아내와 딸을 생각하게 된다.

부산진을 함락한 다음 날 사야가는 조선군에게 귀화하고 싶다는 편지를 쓴다. 이렇게 사야가는 귀화하여 김충선이라는 새 이름을 하사받는다. 본은 김해김씨, 이름은 충성하고 어진마음이라는 충선을 하사 받게 된다.

조선에서는 이렇게 귀화한 병사들을 항복한 왜군이라고 하여 항왜라고 불렀다. 이런 항왜를 활용하여 일본의 사정을 파악하고 조총 등 무기 관련 기술을 습득하였다.

김충선이 된 사야가도 조선군에게 조총 사용법 등을 조선군에게 알려주어 조선 조총부대를 만들게 된다. 왜군들에게서 노획한 조총으로 훈련한 김충선의 조선군 조총부대는 울산성 전투에 참전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된다.

김충선은 그 후 1624년 이괄이 난, 1636년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화약제조와 조총기술 등을 전수하면서 조선의 명장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경상도 달성군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사야가는 조선이 꾸며낸 조작극이라고 주장한다하지만 1970년 작가 시바 료타로의 연구로 사야가는 김충선이라는 것을 밝혀 낸다그리고 사야가를 천하의 매국노이며 증오의 대상이라고 하였다일본에서도 아예 사라져버린 사야가의 가문이지만 한국과 일본의 후손들은 한국과 일본의 평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그리하여 해마다 달성군에 있는 달성한일우호관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방문하여 김충선 장군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모회당 술회록> - 김충선의 문집

-김충선 장군의 조선군 부임당시 이미 조선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고 그나마 들고 있는 창과 검의 훈련법마저 미숙한 상태였다.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킨 왜군에 환멸을 느낀다.

 

달성한일우호관 http://www.dskjfriend.kr/main

 -녹동서원(숭의당): 대구 달성, 모하당 김충선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

 -녹동사: 모하당 김충선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

  -김충선 장군 묘소: 녹동서원 뒷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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