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문명이 남긴 위대한 문화 유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아부심벨 신전입니다. 아부심벨 신전은 이집트 전성기를 이끌었던 람세스 2세의 신전입니다. 호루스 신을 위해 지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람세스 2세 자신을 위해 건축한 신전으로 추측됩니다. 람세스 2세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 4개를 입구에 나란히 배치하고, 벽에는 전쟁에서 세운 공적을 새겨 놓았습니다. 조각상은 약 20미터나 된다고 하니 그 위용이 느껴집니다. 신전 옆에는 아스완 댐 건설로 생겨난 나세르 호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아부심벨 신전은 현재보다 70m 아래 쪽에 있었는데 아스완 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유네스코의 헌신과 각국의 협력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아부심벨 신전을 옮기는 비용을 보탠 국가라고 합니다. 

둘째, 카르나크 신전입니다. 카르나크 신전은 파라오가 아몬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냈던 신전입니다. 사다리꼴 모양으로 된 세계 최대의 신전으로 신전 안에는 파피루스 모양을 본뜬 거대한 돌기둥이 134개나 빼곡하게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돌기둥의 색이 바래졌으나 각 기둥마다 람세스 2세의 업적과 이집트 신화가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카르나크 신전은 원래 모래 밑에 묻혀 있어 현재 일부분이 보수와 발굴작업이 이뤄졌으나 엄청난 넓이로 아직 조금밖에 발굴을 하지 못한 상태라고 합니다. 

셋째, 룩소르 신전입니다. 카르나크 신전의 부속 건물로 지어진 신전으로 풍년을 비는 오페트 축제가 열리던 장소입니다.오페트 축제는 카르나크 신전에 있는 아몬 신상을 룩소르 신전으로 옮기는 행사입니다. 오페트 축제때에는 황금색의 배를 타고 나일강을 한 바퀴 돌아본 뒤에 아몬 신상을 가마에 태우고 룩소르 신전에 가지고 와서 24일간 모셨다고 합니다. 아몬 신상을 모시며 풍년을 기원하던 이집트인들의 모습이 짐작됩니다.

넷째, 오벨리스크 입니다. 이것은 태양신과 관련된 돌탑으로 거대한 바위를 조각하여 만든 끝부분이 뾰족하고 모양은 사각형인 탑입니다. 오벨리스크는 여러 개를 만들었는데, 이집트를 침입한 나라들이 자기 나라로 가져가서 파리나 로마 등지에 있습니다. 현재 이집트에는 몇 개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오벨리스크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태양의 도시 헬리오폴리스의 오벨리스크입니다.

다섯째, 기자의 3대 피라미드입니다. 3대 피라미드는 쿠푸왕, 카프레왕,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입니다. 이중 가장 큰 것은 쿠푸왕의 피라미드로 가로와 세로가 230미터, 높이가 146미터나 되는데 약 270만개의 돌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피라미드는 현재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지었는지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섯째, 카프레 왕의 대 스핑크스 입니다. 스핑크스는 사자 모양을 하였으며 피라미드나 신전을 지키는 수호신입니다. 몸뚱이는 사자 모양이지만 얼굴은 파라오의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스핑크스는 테베의 암산에 살면서 아침에 네발, 낮에는 두발, 저녁에 세발로 다니는 짐승은 무엇이냐 라고 물어보고 답을 하지 못하면 잡아먹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곳에 있던 바위를 조각하여 길이 74미터, 폭 19미터, 높이 20미터가 되는 세계 최대의 조각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핑크스는 그리스어에서 괴물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로 이집트 사람들은 지평선의 호루스라고 불렀습니다. 

 효종은 인조가 청에게 삼전도에서 항복했던 병자호란의 치욕을 되갚기 위해 청나라를 침공하려는 북벌을 추진하였습니다. 하지만 효종 시대에는 청나라의 군사력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입니다. 이 무렵 청나라에 갔던 영국대사는 청의 군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청군의 군사력이 어마어마 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에게 청군이 너무 강하니 청나라와 무력 충돌을 하면 안된다고 영국 정부에 보고하였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 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나라가 효종 시대의 청나라 였습니다.

 조선의 지식인 대다수도 청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효종은 자신이 청나라에 볼모 생활을 하면서 청나라의 전반적인 상황을 알고 있어 북벌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종은 북벌을 꾸준히 추진하였습니다. 북벌을 위해 정예군을 뽑아 강도 높은 훈련을 하고 훈련 상황도 직접 평가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어느날 효종이 "여기에 깃발을 세워 두었는데, 이 깃발을 가장 먼저 뽑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단순히 기마병들의 달리기 경주가 아니라 각 부대별로 진열을 갖추고, 신호에 따라 질서 있게 군령을 지키며 신속하게 진격하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효종이 기를 흔들면 준비하고, 나팔을 불면 전 부대원이 출발한다고 말한 후 친히 산 위에서 신호를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효종은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효종이 산에 오르기도 전에 신호를 내리기도 전에 군사들이 서로 먼저 깃발을 차지하려고 달려 나갔습니다. 군대의 진영은 엉망진창이고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하는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습니다. 군대의 가장 중요한 것이 명령과 신호에 따라 신속하게 진격하는 것인데 신호에 따르지 않는 군사들을 보고 효종은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있으면서 청의 팔기군의 훈련은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기에 그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청은 되는데 조선이라고 안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지휘관을 불러 크게 혼을 내고 다시 훈련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효종이 깃발을 들고 준비 신호를 보냈지만 벌써 출발한 군사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군사들도 먼저 깃발을 차지하겠다고 신호를 무시하고 출발하였습니다. 효종은 너무너무 화가 났습니다. 효종은 먼저 출발한 병사를 잡아다가 죽이고 부대 앞에 목을 걸어 놓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많은 훈련을 하였는데도 신호를 지키지 않는 기본조차 되지 않았던 조선 최고의 정예병을 보고 단단히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북벌을 하고자 하는 나라는 세계 최대의 강대국 청나라인데 조선군은 오합지졸로 현재 상태로는 100% 참패를 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청나라의 모태가 되는 건주여진은 원래 조선군에게도 대적할 수 없었던 너무나 미약한 부족이었습니다. 명나라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했던 여진족에게는 명을 정벌해야 한다는 강한 원동력이 있었습니다. 명을 정벌해야만 여진족의 처지를 바꿀 수 있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또 명과 조선에게 핍박을 받았던 부족들에게 여진의 지배층은 명을 정벌해야만 우리들이 훨씬 잘 살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명을 정벌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보다 나은 삶을 향해서 열심히 훈련에 참여하고 전술을 연구하였던 것입니다. 훈련 할 때에는 무조건 참여가 아니라 수당도 지급하여 훈련 참여 동기를 북돋아 주고, 명을 정벌 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효종은 청에 있으면서 명나라를 정벌한 것처럼 조선도 청을 정벌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효종은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북벌에 대한 강한 공감과 의지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습니다. 청은 명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이라 명을 쳐야만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으나 조선은 청을 쳐야만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지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자 라는 것은 조선의 아픔이지 단지 그것 때문에 행복한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효종의 북벌론은 세계 최강대국 청나라를 공격하는 것으로 매우 큰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런 거대한 계획에 백성들은 꼭 북벌을 해야만 하는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동의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북벌을 하자 라는 구호만 요란했지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훈련에 참여하거 억지로 훈련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신호를 무시하고 먼저 깃발을 차지하려고 달려나간 것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통일을 해야 한다. 또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다. 라고 백날 떠들어봤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대다수 국민들의 통일을 해야 한다는 가치가 있는지 동의를 얻어야 하고 그래야만 국민들이 스스로 통일에 대해 노력할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최고의 회사가 되자. 라고 구호를 외쳐도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 공허한 메아리로 끝날 것입니다. 북벌도 그렇게 구호로만 끝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만 북벌을 추진하며 계획을 거창하게 세웠던 효종의 고뇌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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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저희 집 드레스룸에서 뭔가 타는 냄새인지 공사장 냄새인지 희안한 냄새가 납니다. 도대체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환풍기를 4시간 정도 틀어놓고 마트에 가서 필요한 것을 사고 영화도 보고 왔는데 그때부터 냄새가 진동합니다.

드레스 룸을 열때마다 옷을 빨리 꺼내 입고 나와야 할 정도로 머리가 아픕니다. 그 냄새가 점점 심해져서 안방까지 전해져 옵니다. 위집이 이사를 왔는데 이사오기 전에 각종 확장 공사를 하여 그 냄새가 우리 집까지 전해져 오는 줄 알고 어쩔 수 없이 공기청정기를 2대 더 샀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냄새나는데 위집은 얼마나 냄새가 날까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확장 공사 냄새라면 곧 없어지겠지 하고 참으며 공기청정기를 터보로 계속 틀었습니다. 하지만 냄새는 없어질 줄 모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위집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냄새의 원인을 모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늘 청소도 열심히 하고, 걸레질도 수시로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20일 여행갔다 왔는데 이젠 냄새가 없어졌겠지 하고 드레스룸을 열었는데 그 냄새는 아직도 코를 자극합니다. 이제는 전기 줄 타는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집 방문 손잡이가 고장 났습니다. 관리사무실에 전화하였더니 손잡이만 사 놓으면 언제든지 오셔서 고쳐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 앞에 있는 철물점으로 가서 방문 손잡이를 삼만 오천원 주고 사왔습니다. 관리소 직원이 오셔서 정성껏 방문을 고쳐 주셨습니다. 방문 고치는 것 옆에서 보니 정말 쉬웠습니다. 다음에 혹시 방문이 고장나면 제 힘으로 고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 드레스 룸에서 냄새 나는 것을 기억하고, 관리 사무실 직원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형광등 안정기가 타는 냄새라고 합니다. 그것도 우리 아파트에 우리 집처럼 안정기가 타는 세대가 몇 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청정기만 주구장창 틀어댔습니다. 아무리 틀어도 냄새가 계속 나니 청정기가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화재의 위험이 있다고 하며 고쳐주셨습니다. 고치는 방법은 아예 형광등의 전원을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제가 LED등으로 드레스 룸에 달았기에 그 형광등은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진작에 관리사무실 직원에게 물어 봤으면 몇 달동안 계속된 지독한 악취를 이겨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파트에 무슨 문제가 있으면 제가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관리사무실 직원에게 물어보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집에 전기 타는 냄새인지 뭔지 모르는 희안한 냄새가 나면 안정기가 타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보시고 바로 관리사무실에 연락하여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문을 열어놓고 청정기 틀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특히 위험한 것은 화재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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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영국에서 가기로 한 곳은 대영 박물관입니다. 숙소에서 우버를 부르고 갔더니 약 15파운드 나옵니다. 우버에서 내린 후 영국박물관 입구에 도착하니 벌써 아침부터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영국 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도 줄을 서고 간단한 검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의 장점은 표를 끊지 않고 무료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전시품을 돈 한푼 내지 않고 관람할 수 있다니 정말 좋았습니다. 자국의 전시물이 일정량을 넘지 않으면 입장료를 받을 수 없다는 국제박물관헌장과 문화 유산은 모두 함께 향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료 입장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세계 최초의 국립 공공 박물관인 대영박물관에 딱 들어서니 세계 여행을 하는 것 처럼 다양한 문화 유물이 우리를 반겨 주었습니다. 특히 이집트 전시관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로제타석, 미라, 람세스 흉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전시물이 저의 발길을 잡았습니다. 작품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계 오디오 가이드는 대여해서 들으면 한국어로 설명이 되니 가급적 빌려서 사용하기를 권합니다. 이것은 엘리자베스2세 그레이트 코트의 하늘이 투명한 유리로 된 창이 있는 광장에서 대여할 수 있습니다.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채광하여 보기에도 참 좋습니다. 너무 넓은 박물관이기 때문에 길을 잘 따라 걸어야 합니다. 저는 길을 잘못 들어 갔던 곳에 또 가고 많이 헤매었습니다. 혹시 길을 잘 못찾는 사람이라면 현지가이드 투어를 신청할 수도 있으나 비용이 발생합니다. 저같이 여유롭게 하루에 2개정도 본다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다니실 분이라면 오디오 가이드도 충분히 괜찮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져온 수많은 전시물과 영국 자체의 유물 등 소장품이 매우 방대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여기 박물관에 있는 전시물을 자세히 살펴보려면 약 한달도 넘게 걸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유물들이 있습니다. 건물 외부를 살펴보면 기둥이 참 인상적입니다. 그리스 신전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기둥들이 우리를 압도합니다. 기둥 두께도 상당합니다. 완전히 매끄러운 기둥이 아니라 우둘두툴한 모양입니다. 지붕 근처에는 여러개의 사람 조각상이 있습니다. 이것도 사람이 지식을 얻고 성장하고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상징하는 조각품이라고 합니다. 조금 높게 있어 자세히 관찰하기는 어렵지만 대영제국 깃발이 펄럭이는 바로 아래 조각상들이 늠름하게 오밀조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곳 유물 중 기억이 남는 곳은 이집트전시관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붐볐던 곳으로 클레오파트라 미라까지 전시되어 있으니 정말 신기한 박물관입니다. 또 우리나라 유물인 고려 청자나 백자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대영박물관 아니 영국박물관에서 유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아! 이곳에서 그냥 하루 종일 관람하는 것으로 계획했으면 더 좋았겠다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1. 우루무치 2018.06.19 18:35 신고

    영국인들 바보인가 봅니다
    로제타석이나 람세스 2 세 흉상은 이집트 박물관에 있어야 할 보물들을 훔쳐오든지 강탈해 온것이 분명한데 참 뻔뻔스럽게 전시해 놨더군요
    일제때 왜놈들 처럼요

영국에 와서 뮤지컬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여 설마 그럴까 했는데 진짜 가보니 한국사람들이 여럿이 또는 혼자 관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뮤지컬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도대체 왜 여기까지 와서 뮤지컬을 보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집사람이 뮤지컬 관람을 정기적으로 하는 편이고 뮤지컬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 아이들도 영화볼거야 아니면 뮤지컬 볼거야 하면 뮤지컬을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뮤지컬을 보러 가면 저는 주차장 차 안에서 잠을 자거나 커피집에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냅니다. 데리고 가는 운전 기사 역할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저도 모르게 제 티켓까지 예약을 집사람이 했습니다. 그래서 관람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관람한 뮤지컬은 마틸다입니다. 마틸다는 정말 영특하고 또 마틸다 역을 맡은 작은 꼬마 숙녀가 너무 연기를 잘하더라구요. 마틸다는 책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마틸다를 성심성의껏 돌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학교에 입학한 마틸다는 거기서 이상한 교장선생님을 만납니다. 늘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트런치불 교장이 사사건건 아이들을 제지합니다. 학생들은 그런 교장선생님이 너무나 싫습니다. 그러나 나쁜 사람만 있지 않습니다. 학생들을 늘 어머니처럼 또는 누나처럼 사랑으로 대해주는 예쁜 여자 선생님이 계십니다. 이 배우의 얼굴을 보니 정말 저는 착합니다. 라고 써 있는 것처럼 선하게 생겼습니다. 분장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출연 배우 섭외 때 그런 사람으로 했는지 정말 착하게 보였습니다. 교장 선생님 역할을 담당한 배우는 남자인데 여자처럼 분장하였습니다. 악역이지만 이 사람도 너무 실감나게 연기를 잘합니다. 뮤지컬을 보고 나온 다음에도 이 사람의 연기가 생각날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우의 표정 하나하나가 실감나게 기억납니다. 트런치불 교장은 원래 선하게 생긴 허니의 이모입니다. 그런데 트런치불 교장이 허니의 아버지의 학교를 빼앗았습니다. 너무 강압적인 교장이기에 마틸다와 친구들은 악독한 교장을 쫓아내기 위한 계획을 수립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힘과 마틸다가 초능력을 발휘하여 교장을 몰아냅니다. 그후 마틸다는 허니 선생님에게 입양이 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는 내용을 뮤지컬이었습니다. 제가 앉은 자리는 앞에서부터 3번째 자리인데 배우들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를 살필 수 있었습니다. 얼굴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고, 배우의 숨소리까지 들리니 정말 실감났습니다. 저는 뮤지컬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마틸다 뮤지컬을 관람하고 나서 사람들이 왜 뮤지컬에 열광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마틸다 공연장 의자의 앞뒤 간격이 너무 좁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제가 앉은 자리 바로 앞 좌석의 의자가 펴지지 않은 상태라 발이 의자에 걸려 발을 뻗기 더욱 어려웠습니다. 쥐가 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키가 184인데 영국 사람들은 저보다 훨씬 몸집이 크던데 그 사람들이 관람하기에 의자 간격이 너무 좁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관객을 더 많이 받으려고 한 것 같은데, 조금 개선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처럼 뮤지컬을 보기 귀찮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틸다를 보면 뮤지컬이 재미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에 가시면 마틸다 뮤지컬 꼭 보고 오시길 강력 추천합니다.

 체코 프라하 신광장에서 가이드님과 미팅을 한 후 인원 점검을 하였습니다. 인원점검이야 뭐 우리 가족 4명입니다. 가이드님의 포드 승합차를 타고 씽씽 차를 달려 독일의 작센주에 있는 작센 스위스에 도착하였습니다. 주차장 1층에 주차를 하고 한참을 걸어올라갔습니다. 여기 오는 날 컨디션이 별로 좋지 못해 멀게 느껴졌을 뿐 실제로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올라가는데 날씨가 흐려 습기가 많아 숨을 쉬기 조금 어려웠습니다. 이날은 꼬마열차가 운행되지 않아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독일과 체코의 국경지대에 위치하였는데 독일의 작센스위스 국립공원(바스타이 국립공원)과 체코의 보헤미안스위스 국립공원도 이 지역에 속한다고 합니다.

 작센스위스 성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엘베강이 평화롭게 흐르고 그곳을 따라 기차가 가는데 참 보기 좋았습니다. 작센스위스라는 말은 스위스 출신의 화가가 이곳에 거주하면서 풍경이 자신의 고향인 스위스처럼 경치가 좋다고 하여 작센스위스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말이 굳어져서 현재에도 작센스위스라고 부릅니다. 어렵게 올라간 성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정말 끝내줬습니다. 성 위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각각의 경치가 조금씩 달라 보는 사람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었습니다. 드레스덴만 가지 마시고 꼭 작센스위스를 보고 갈 것을 적극 추천드립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은 바슈타이입니다. 바슈타이는 독일 말로 요새란 뜻입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암벽이 밀집되어 있어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너무 험한 바위로 둘러싸인 지역이라 적이 함부로 침입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기암괴석들을 바라보며 암벽등반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천혜의 장소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은 관광객들은 아래를 쳐다봤을 때 조금 무서울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함께 있는 쾨니히슈타인 성도 이곳의 명소이니 함께 둘러보면 좋습니다. 역사상 단 한 차례도 함락된 적이 없다는 작센스위스의 요새는 왕궁, 사원, 감옥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감옥으로 쓰였을 때는 정말 탈옥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워낙 요새와 같은 지형이라 정말 탈옥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어졌는데 가이드님이 한명이 탈옥한 사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성안 사람들의 식수로 사용되던 우물도 있었는데 공사 중이라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 성을 한 바퀴를 돌아보며 자연 그대로의 바위를 그대로 활용하여 성을 쌓은것이 축성술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성 안에 많은 대포들이 있는데 수 백년전에 제작된 것인데도 요즘도 축포를 쏜다고 가이드님이 알려주셨습니다.

 이곳은 자유여행으로 오실 때 교통편이 불편합니다. 가이드를 예약하여 작센스위스와 드레스덴을 함께 보고 올 것을 추천드립니다.

 지난 번 가족 모임에는 누나네 집에서 모였습니다. 그런데 매형이 회를 매우 좋아합니다. 술을 드실 때에는 삼겹살은 별로라고 하며 늘 수산시장에서 회를 떠다가 드십니다. 그런데 이번 모임은 누나가 새 집으로 이사를 가서 집들이 겸해서 모인 것인데 근처에 수산시장이 없어 회를 배달시켰습니다. 스티로폼 박스 겉표지를 보니 지혜수산이라고 써져 있었습니다. 아들 녀석이 회를 아주 잘 먹어서 너무 좋아하며 막 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지혜수산 전화번호를 핸드폰으로 찍었습니다. 집에 가면 한번 시켜서 먹을 계획이었습니다.

 매형에게 대천항 많은 곳 중 이곳에 전화해서 시켜 먹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매형은 회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본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전에 대천항에 갔을 때 우연히 지혜수산에 들어가서 회 포장을 시켰는데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이 친절하였다고 합니다. 또 수족관에 있는 고기 중에서  병들거나 싱싱하지 않은 고기를 지목하며 횟감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고기는 매운탕이나 끓여먹는다고 하며 사장님이 알아서 회를 떠 주었는데 그게 너무 맛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은 양심적으로 한다고 생각하여 늘 이곳에만 전화하여 회배달 시켜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집으로 돌아온 후 약 2주일 후에 대천항에 전화하였습니다. 주문을 했더니 10만원은 횟값, 1만원은 배달비, 총 11만원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속버스가 출발하였다고 하며 5시쯤 도착할 것이라고 문자가 왔습니다. 고속버스가 도착할 즈음 터미널로 나갔더니 저처럼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드디어 버스가 도착하여 기사님에게서 택배를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스티로폼 박스를 받는 것으로 보아 회를 배달 시킨 것 같았습니다. 스티로폼 박스를 3개 받았는데 회가 2개, 매운탕 재료가 1개가 배달되어 왔습니다. 

 집으로 와서 스티로폼 상자를 열었더니 먹음직스러운 회가 들어있었습니다. 회 밑에는 얼음이 좍 깔려있어 고속버스를 타고 오면서 숙성이 잘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젓가락으로 한 개를 집어 먹으니 정말 맛이 끝내줍니다. 생선은 광어, 방어, 놀래미, 우럭 4종류의 회가 들어 있습니다. 사장님이 먹기 좋은 크기로 두툼하게 회를 떠 주어서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가끔 일반 마트에서 회를 사다 먹곤 했는데 이젠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천항에서 직송된 회가 너무 맛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가끔 대천항에서 고속버스 회배달을 시켜서 맛있게 먹어야겠습니다.




 조선의 과거 시험은 3년에 한번씩 치러졌는데 정말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유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한양의 과거 시험장에서 낙담하고 돌아간 지방의 선비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왜냐하면 문과의 최종 합격자는 33명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 팔도의 선비들은 이 과거시험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렇지만 합격하기 너무나 어려워 다양한 꼼수들이 등장하였습니다. 남의 답안지에 시험관 눈을 피해 몰래 자기 이름으로 바꿔 쓰기, 뇌물을 써서 시험관을 매수하기, 붓에 숨겨오기, 도포 자락에 예상 답안을 몰래 써 넣기, 밖에서 써준 답안지를 몰래 건네 받아 답안지 완성하기, 신체 일부 기관에 예상 답안을 숨겨 오기 등등 다양한 꼼수가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꼼수는 통하기 어려웠습니다. 우선 시험 전에 철저하게 몸 수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보는 사람들간의 거리는 1.8미터를 유지하였습니다. 혹시라도 시험 감독관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 응시하는 경우는 그 사람을 다른 시험장으로 옮겨 배치하였습니다. 응시자의 인적 사항을 오려내아 따로 보관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누구의 글씨인지 시험 채점관이 알 수도 있기 때문에 시험관이 다른 종이에 답안을 옮겨 적은 후 채점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걸리면 정도에 따라 3~6년 정도 시험볼 기회를 박탈하였으며, 다른 사람 시험지를 보고 쓰다가 걸리면 곤장을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문이나 혈통 등 모든 청탁과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시험과 채점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순수한 실력 만으로 인재를 뽑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평균 시험 준비 기간이 20년 정도 걸렸다고 하니 결국 과거 준비에 몰두할 수 있게 해줄 경제력이 필수였습니다. 그러니 결국 경제력과 권력이 있는 양반 집안의 자제들이 과거시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평민들도 과거 시험을 볼 수는 있지만 책을 사야 할 돈이나 가정 경제를 운영할 경제력이 없어 평민들은 과거 시험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과 시험에서 소과는 생진과라고도 하며 생원이나 진사를 뽑는 시험입니다. 이 소과를 합격해야만 하급 관리로 채용될 수 있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한 후 대과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소과에 합격한 후 대과 시험을 치르는데 초시는 수 만명의 응시자 중 240명을 선발합니다.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240명을 대상으로 복시를 치릅니다. 복시에서는 총 33명을 선발합니다.(무과의 경우는 28명 선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인 전시가 있습니다. 전시는 합격 불합격을 따지는 것 보다 순위를 매기는 시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임금님 앞에서 33명이 최종 순위 경쟁을 합니다. 최소 5등 안에 들어야 앞으로 고위 관료로 승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33명 중에서 1등을 하면 장원급제라 하였으며 이후 관직의 승진에 있어 많은 이점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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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과거시험을 통해 인재들을 잘 선발하여 유교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문과, 무과, 잡과 등의 과거를 통해 문신, 무신, 기술 전문직 관리를 선발했던 일종의 공무원 시험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공무원 시험보다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뽑는 인원 수도 적고, 시험 공부 기간도 보통 20여년 정도 걸렸습니다. 물론 뛰어난 천재들은 일찍 과거시험에 합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과거 시험 중 무과 시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유명한 장군인 이순신 장군도 무과에 급제하여 장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도 말에서 떨어져 불합격하여 4년 후 다시 도전하여 1576년 병과 4위로 급제합니다. 유교국가였던 조선은 문신과 무신의 양반제 사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태종 2년인 1402년 무과 시험이 처음으로 시행됩니다. 3년에 한번 시험보는 정기시험인 식년시와 나라의 경사가 있거나 인재의 등용이 필요한 경우에 치르는 별시가 있었습니다. 별시 중에서도 지방에서 행한 예도 있었는데 이를 외방별시라고 합니다. 세조 때에 온양, 평양, 강릉에서 시험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양별시, 평양별시, 강릉별시라고 불립니다. 식년시 무과는 최종 28명을 선발합니다.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입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이 병과 4위이므로 석차로 따진다면 12등 정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최종 28명의 고위 무관이 되기 위해서는 3단계의 시험이 있었습니다. 1차 시험은 초시라고 부르는데 각 도의 인구 비례에 따라 190명을 뽑았다고 합니다. 경국대전을 보면 서울은 70명, 경상도는 30명, 충청도 25명, 전라도 25명, 강원도 황해도 영안도(함경도) 평안도에서 각각 10명씩 선발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문신 1명과 무신 2명으로 이루어진 시험관 감독하에 공정한 심사를 거쳐 초시 합격자 중 28명을 추렸습니다. 이 시험이 2차인 복시입니다. 경국대전 병전 편에는 무예 실기과목이 적혀 있습니다. 모두 6개로 나누어 무예 실기 시험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240보(약 288미터)거리에서 화살을 쏘는 목전입니다. 목전은 시험용으로 나무로 만든 화살인데 3발이 사용됩니다. 둘째, 130보(약 156미터)거리에서 작고 짧은 화살을 쏘는 편전입니다. 편전은 애기살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짧고 사정거리가 깁니다. 셋째, 80보(약 96미터) 거리에서 무거운 화살을 쏘는 철전입니다. 깃은 좁고 날이 없는 둥근 철촉을 달았으며 사정거리는 80-180보입니다. 넷째,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입니다.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목표물을 맞히면 5점을 주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무예에서 중요시 되었으나 나중에는 총이 발달함에 따라 중요성이 떨어졌습니다. 다섯째, 말을 타고 달리며 창을 다루는 기창입니다. 말을 타고 가다가 목표물을 찌르면 점수를 얻었습니다. 여섯째, 말을 타고 작은 공을 다루는 격구입니다. 말을 타고 숟가락처럼 생긴 막대기로 공을 쳐서 상대을 골대에 넣는 일종의 놀이입니다. 놀이이지만 조선은 중요한 무예의 하나로 생각하였으며 군대 열병식에도 꼭 실시하였다고 합니다. 무과는 이렇게 다양한 활쏘기와 마상 무예로 이루어졌으며 무과 실기는 최고의 무관을 선발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세종 때 신하들이 문과는 어렵고 무과는 쉽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과에 많이 몰린다고 아룁니다. 사람들이 학문을 깊이 연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무과에 몰리면 학문이 진흥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그래서 추가된 것이 복시에 병법과 유교경전 등에 관한 구술시험입니다. 장수가 무예만 있고 지략이 없다면 작전을 제대로 짜지 못하고 적을 관찰하여 변화에 수응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구술 시험이 추가된 것입니다. 최종 28명이 선발되면 마지막 관문인 3차 시험 전시입니다. 이 시험은 임금 앞에서 시험을 보게 됩니다. 여러 가지 무예를 시험하고 무예 점수에 따라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을 최종 선발합니다. 이중에서 갑과에 1등한 사람을 무과의 장원, 즉 무괴라고 불렀습니다. 화살을 쏘거나 창을 다루는 궁술과 말을 타는 기마 전술에 중점을 두었던 조선의 무과는 임진왜란 이후 변화됩니다. 바로 총포의 등장과 전술의 변화로 조총, 편추, 유엽전 등 무과의 시험과목이 확대된 것입니다. 약 500년동안 조선의 무장을 뽑은 무과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근대식 관리 선발제도가 생겨나면서 폐지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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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중국 명나라 대명률에 따라 우리나라 형벌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은 수정하여 실시하였고 형벌도 다섯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우리나라 형법을 다시 만들지 않고 중국 명나라 것을 수정하여 쓴 이유는 대명률이 유교적 이념에서 만든 율서이기 때문입니다. 유교적 이념이 강하기 때문에 예를 중시하고 관용을 중시합니다. 그럼 다섯 가지 형벌은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한 형벌인 태형입니다. 다섯 가지 형벌 중 가장 가벼운 형벌입니다. 엉덩이를 노출시킨 채로 물푸레나무로 만든 작은 형장으로 볼기를 칩니다.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서 10~50대까지 볼기를 쳤습니다. 

 둘째, 태형보다 죄질이 무거운 사람에게 내리던 형벌인 장형입니다. 태형과 마찬가지로 다섯 등급으로 나누었으며 60~100대를 맞습니다. 긴 형장을 사용하였으므로 10대 정도만 맞아도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고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태형과 장형 모두 엉덩이를 노출 시킨 채로 대수를 세어가며 볼기를 쳤습니다. 다만 여인들이 죄를 지었을 경우 엉덩이를 노출시키지 않은 채로 볼기를 쳤습니다.  70세 이상의 노인들, 15세 이하의 어린 아이, 폐병에 걸린 사람, 임신부와 같은 사람들은 매를 맞지 않고 속전이라 불리는 벌금으로 대신하였다고 합니다.

 셋째, 지금의 징역형과 비슷한 도형입니다. 중죄를 범한 자에게 노역까지 시키는 형벌입니다. 곤장 60대부터 최대 100대까지 곤장을 쳤습니다. 죄질에 따라 1년에서 최대 3년까지 노역 기간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감옥에 복역하던 중에 병이 나면 병가를 주었고, 역모죄가 아닌 이상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휴일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넷째, 매우 중한 죄에 대한 형벌로 유형이 있습니다. 사형 대신에 먼 지방에 유배 보내 죽을 때까지 살게 하는 것입니다. 유배 중에 간혹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다시 한양으로 복직될 수도 있었습니다.  한양에서 멀리 보내려고 이천 리, 이천 오백리, 삼천 리 세 등급의 유배거리가 있었지만 중국과 달리 국토가 좁아 유배지로 곧장 가지 않고 거리에 맞게 끔 빙빙 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태안으로 삼천 리 유배를 간다면 강원도나 충북까지 들러 삼천 리가 되도록 걸어 간 다음에 유배지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중죄인들에 대한 형벌이므로 홀로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에 격리하는 절도 안치와 거주지 제한하고자 유배지 둘레를 탱자나무로 둘러싸 가두는 위리안치가 있었습니다. 외부 출입을 제한하고 금지하는 형벌이었던 안치는 왕족이나 고위 관료층에게만 적용된 형벌입니다. 힘들고 외롭고 가혹한 형벌이지만 유배는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허준의 동의보감과 정약용의 각종 방대한 저서들은 유배 중에 저술되었습니다.

 다섯째는 사형입니다. 오늘날 교수형과 비슷한 교형, 목을 베는 참형, 사지를 찢어 죽이는 잔인한 형벌인 능지처참이 있었습니다. 역모를 범한 죄인들은 본보기로 삼기 위해 참형으로 목을 친 다음 베어낸 머리를 만인에게 공개하는 효수에 처해졌습니다. 왕족과 고위 관료에게는 대역죄가 아닌 이상 그들의 품위를 위해 사형이 아닌 사약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사약이라고 죽을 사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그게 아니라 하사할 사자를 씁니다. 즉 먹으면 죽는 약이 아니라 임금님이 내리는 약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세 차례에 걸쳐 정확히 조사하도록 하였습니다. 혹시라도 잘못 조사하여 엉뚱한 죽음을 맞을 수도 있어 정확한 조사를 해서 임금에게 아뢰야 합니다. 시형 집행에 대한 권한은 오직 국왕에게만 있었으며 사형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 차례의 철저한 재판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런 다섯 가지 형벌을 하면서 곳곳에서 형벌을 남용하는 사례가 빈번했습니다. 그래서 사회 문제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에 형구의 규격과 사용법을 적은 흠휼전칙, 형법 내용을 보기 좋게 정리한 전률통보 등의 전문적인 법률 서적을 발행하였습니다. 지방관의 올바른 형장 사용과 공정한 법률 집행을 알아보기 위해 비밀리에 파견된 암행어사의 업무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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