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414. 임진왜란 발발로 조선땅은 아비규환으로 현장으로 변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정벌하러 갈 테니 조선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하며 우리나라를 침입하였다. 생전 처음보는 무기인 조총으로 생전 처음보는 무기를 들고 나타난 왜군부대는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조선을 손쉽게 유린하였다.

그 왜군부대 중 조총부대를 이끌던 사야가

그는 조선의 문화를 동경하여 처음부터 투항을 결심하였다고 그의 저서 모하당술회록에 적어 놓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아내와 딸을 볼모로 조선에 출병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어쩔 수 없이 출병한 사야가.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이런 불합리하고 의롭지 못한 전쟁을 찬성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선진 문화의 조선을 동경하였으며 기회를 틈타 조선에 귀화하리라 마음 먹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자신의 병사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조선인 모녀를 목격하게 된다.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아내와 딸을 생각하게 된다.

부산진을 함락한 다음 날 사야가는 조선군에게 귀화하고 싶다는 편지를 쓴다. 이렇게 사야가는 귀화하여 김충선이라는 새 이름을 하사받는다. 본은 김해김씨, 이름은 충성하고 어진마음이라는 충선을 하사 받게 된다.

조선에서는 이렇게 귀화한 병사들을 항복한 왜군이라고 하여 항왜라고 불렀다. 이런 항왜를 활용하여 일본의 사정을 파악하고 조총 등 무기 관련 기술을 습득하였다.

김충선이 된 사야가도 조선군에게 조총 사용법 등을 조선군에게 알려주어 조선 조총부대를 만들게 된다. 왜군들에게서 노획한 조총으로 훈련한 김충선의 조선군 조총부대는 울산성 전투에 참전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된다.

김충선은 그 후 1624년 이괄이 난, 1636년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화약제조와 조총기술 등을 전수하면서 조선의 명장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경상도 달성군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사야가는 조선이 꾸며낸 조작극이라고 주장한다하지만 1970년 작가 시바 료타로의 연구로 사야가는 김충선이라는 것을 밝혀 낸다그리고 사야가를 천하의 매국노이며 증오의 대상이라고 하였다일본에서도 아예 사라져버린 사야가의 가문이지만 한국과 일본의 후손들은 한국과 일본의 평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그리하여 해마다 달성군에 있는 달성한일우호관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방문하여 김충선 장군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모회당 술회록> - 김충선의 문집

-김충선 장군의 조선군 부임당시 이미 조선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고 그나마 들고 있는 창과 검의 훈련법마저 미숙한 상태였다.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킨 왜군에 환멸을 느낀다.

 

달성한일우호관 http://www.dskjfriend.kr/main

 -녹동서원(숭의당): 대구 달성, 모하당 김충선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

 -녹동사: 모하당 김충선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

  -김충선 장군 묘소: 녹동서원 뒷산에 있습니다.

<앙리무어의 엄청난 발견>

1860

프랑스 식물학자, 박물학자인 앙리무어가 캄보디아를 찾아옵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찾아온 이곳에는 프랑스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동식물들이 있어 앙리무어는 연구의 성과를 낼 수 있어  큰 기대를 하고 옵니다. 그렇게 찾아온 그가 어마어마한 발견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밀림속에 숨겨져 있던 도시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도시가 현재 캄보디아의 중요 관광자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발견을 했는지 알아볼까요?

앙리무어는 동식물연구를 위해 캄보디아의 현지인을 고용하여 밀림탐사를 떠납니다. 밀림 속에서 다양한 동식물을 관찰하며 탐험하던 그는 연신 감탄을 쏟아냅니다. 탐험을 하다보니 밀림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들어가게 됩니다. 어느 순간 캄보디아 현지인들이 더이상 밀림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왜 더이상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까?" 

앙리무어가 이렇게 물어보자, 현지인들은 

"여기는 수백년 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머리가 일곱개인 뱀을 신으로 모시던 때 한 왕족이 밀림 속에 화려하고 거대한 도시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신을 잘 모셨습니다. 그런데 왕족들이 반역을 모의해서 신에게 도전을 합니다. 이에 엄청나게 화가 난 신은 큰 저주를 내립니다. 그 저주 때문에 도시는 밀림으로 뒤덮여져 도시는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사람들과 신에게 도전한 왕족들은 그후 유령이 되어 밀림속을 떠돌게 되었습니다. 그 유령이 이 밀림속에서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들어가면 큰일 납니다. 실제로 이곳에 다녀온 사람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밀림 속을 유령도시라고 합니다. 유령이 나타나고 뱀신에게 홀리면 정신이 나가고 죽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못들어가니 집에 가겠습니다."

"돈을 더 줄테니 함께 더 들어가서 연구해 봅시다." 

앙리무어는 유령도시니 뱀신이니 이런것이 허무맹랑한 소리라 여기고 더 깊은 밀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얼마나 더 갔을까? 뭔가 이상한 기운이 드는 것 같습니다. 

"으악!!!"

 현지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갑니다. 뭔일인가 하고 앙리무어는 앞을 바라봅니다. 그곳에는 뱀의 모양을 그려놓은 조각들이 보입니다. 이걸 보고 현지인들은 뱀신이 나타난 줄 알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지. 뱀신이 어디있어? 유령도시는 또 뭐야?"

이렇게 생각하며 앙리무어는 더 깊이 더 깊은 밀림 속으로 탐험을 합니다. 탐험에 탐험을 한 그는 드디어 어떤 유령같은 건물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그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저게 뭔가? 저게 정녕 유령도시인가? 어떻게 이런 밀림 속에 저런 건물들이 있을까?"

놀라고 흥분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좀더 가까이 가서 연구를 합니다. 그림도 그리고 황홀한 건축물에 넋을 잃기도 하고...... 그렇게 앙리무어는 밀림 속에서 엄청난 발견을 하게 된것입니다. 그리고 무사히 밀림 속을 나와 마을로 와서 그의 조국 프랑스로 돌아갑니다. 그때부터 앙리무어는 이상한 이야기를 중얼거립니다. 캄보디아 밀림 속에는 어마어마한 도시가 있다는 둥 그리스, 로마 건축물과 버금가는 것이 밀림 속에 있다는 둥, 빨리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둥 이렇게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동양의 작은 나라이며 후진국, 그것도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밀림 속에 거대하고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는 사실을 누가 믿겠습니까? 사람들은 앙리무어가 드디어 뱀신에 홀려 미친 것이 아닌가? 유령도시에서 유령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앙리무어가 아무리 밀림 속에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런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면 벌써 발견이 되었을 것 아니냐 하며 앙리무어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다가 1년 정도 지난 후 앙리는 불행하게도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게 됩니다. '멀쩡했던 사람이 밀림 속 유령도시에 갔다오더니 진짜 유령에 홀려 죽은 것이 아닌가?'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하였습니다.

앙리가 젊은 나이에 그렇게 허망하게 죽은 후 그의 부인과 동생은 앙리무어가 캄보디아의 밀림 속에서 보고 그렸던 그림과 글을 모아 <캄보디아 탐험>이란 책을 출간합니다. 당연히 그 책은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합니다. 그러던 1866년 프랑스의 한 도서관에서 우연히 앙리가 쓴 책을 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해군 장교인 루이 들라포르트였습니다.

책 내용 중 그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다음 문장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캄보디아 밀림 속에 솔로몬의 신전에 버금가고 미켈란젤로가 세운 것 같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는 사실이다.>

루이 들라포르트는 앙리무어의 책을 따라 밀림을 탐험하여 거대한 도시와 위대한 건축물 앙코르와트를 발견하게 됩니다.


<수리아바르만 2세>

크메르제국의 제18대 왕으로 앙코르와트의 건설자인 수리아바르만 2세. 그는 12세기 초 현재 태국 롭부리 지방에서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왕이 되기 희박했던 젊은이였다. 당시 왕위 계승 결정권은 브라만 계급의 원로회의에서 결정하였다. 수리아바르만 2세는 매우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이런 젊은이를 눈여겨 본 사람이 바로 왕위 계승 결정권을 갖고 있던 디바카라판티타(브라만 승려)였다. 이 사람은 브라만 계급에서도 권위있던 사람이었다.

1113년 당시 왕은 다닌드라바르만 1세였다. 수리아바르만 2세의 백부였다. 다닌드라바르만 1세 재위 당시 크메르제국은 몹시 혼란한 사회였다. 다닌드라바르만 1세는 본디 승려였으며 시문을 좋아하고 왕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노년에 억지로 추대하여 왕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 혼란한 사회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왕위 계승을 결정했던 브라만들은 당시 무능한 다닌드라바르만을 몰아내고자 야망넘치는 수리아바르만 2세를 선택한다.

그들은 쿠테타를 통해 수리아바르만 2세를 왕위를 올린다. 이때 그의 나이가 17세이다.

여세를 몰아 다닌드라 가문을 몰아내고 1119년 마침내 크메르 제국의 통일 군주가 된다.


<앙코르와트의 건설>

크메르 제국은 오랫동안 오늘날 시엠립에 해당하는 앙코르를 도읍지로 하여 발전해 왔습니다. 하지만 크메르 제국의 성지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시엠립 북동쪽으로 약 40KM정도 떨어진 프놈 쿨렌산맥의 쿨렌산입니다. 이 곳은 802년 크메르 제국이 앙코르 시대를 연 최초의 왕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왕위에 오른 군주는 이곳을 순례하며 선대왕의 권력을 승계했다는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했습니다.

또 쿨렌 산은 종교적으로도 신성시됩니다. 이 당시 종교는 인도에서 들어온 힌두교였고 크메르 왕들은 힌두 최고의 신인 시바를 신봉했습니다. 그리하여 쿨렌산 크발스피앙에는 천여 개의 물속 링가가 있습니다. 링가는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요니를 받침대로 해서 그 위에 원통형의 조각을 올려 고정시켰습니다. 링가는 힌두교 시바신의 성기를 상징하고, 사람들은 링가를 생명의 근원이라 믿었다. 그러니 상류에 위치한 쿨렌산 크발스피앙에 링가를 만들어 생명의 근원과 신의 축복이 물길을 타고 앙코르까지 흘러오도록 한 것입니다.

크메르 제국의 왕들은 재임기에 1~2개의 사원을 건설하였습니다. 시바신의 권위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수리아바르만 2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종교를 개혁하고 국정을 쇄신하고자 또 다른 힌두교의 신 비슈누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왕궁 근처에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사원을 건설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건물이 바로 앙코르와트입니다.

앙코르와트의 석재들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일까요? 바로 40km떨어진 성지인 쿨렌 산에서 가져왔습니다.

코끼리와 인력으로 수많은 석재들을 옮긴 후 조각하여 쌓은 앙코르와트. 세계 제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앙코르와트

동서로 약 1500미터남북으로 약 1300m에 달하는 땅위에 7톤짜리 기둥이 1800개, 돌로 된 방이 260개가 있는 정말 믿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건축기술로 지었습니다 

12세기 동남아시아의 작은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는지 신비로울 뿐입니다.


부대찌개가 왜 부대찌개일까요?
6.25전쟁이 한창이던 그 시절에 생겨난 부대찌개.
당시 미군부대 주변에서는 햄이나 소시지 등을 구하기 쉬웠습니다.
그걸 얻어다가 고추장, 김치 등을 넣어 푹 끓이면 맛나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의 비극에서 태어난 음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부대찌개를 자주 먹지는 않지만 그래도 칼칼한 음식을 먹고 싶을 때는
00부대찌개를 가곤 했습니다.
부대찌개를 시키고 김치를 더 넣어 끓이면 매콤한 그 맛이 참 좋았습니다.

오늘은 뭐 먹을까 하다가 장00부대찌개가 보이더라구요.
사람들도 제법 많이 있어 일단 들어가 보았습니다.
부대 전골이 9,000원 하길래 그걸로 시켰습니다.
잠시 후 나온 부대전골
파, 양배추, 양파가 적절하게 많이 들어간 전골냄비가 나왔습니다.
끓인 후 먹어보니 그동안 먹어봤던 부대찌개와는
다른 맛이 납니다. 깔끔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일품입니다.

그래서 난 오늘도 배둘레가 더 굵어집니다. 2공기나 먹었으니...
또 먹다 보니 중간에 사진을 찍었는데 또 먹고 싶네요.


오후에 아산온천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이순신장군님 묘소를 가 보았습니다.
일본의 침입에서 나라를 구하신 이순신 장군님의 묘소를 보았는데
햇빛이 잘 들어오는 명당 위치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묘지 뒤에는 소나무들이 이순신 장군님을 호위하는 듯이 서 있었습니다.

노량해전 중 전사하여 아산군 금성산에 모셨다가 광해 6년 이곳으셨다는 안내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덕수 이씨 충무공 가족묘소 안내도가 있어서 자세히 읽어보니 이곳에 아버지 이정, 충무공의 형님과 아우들이 함께 영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충무공 묘소만 보고 내려왔는데 조금 아쉽더라구요.
바람만 세게 불지 않았다면 다시 올라가보고 싶었지만 너무 추워서 밑에서만 쳐다 보았습니다. 

사적 112호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을 비석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정조대왕 신도비도 찍어 보았습니다. 정조대왕이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직접 지은 것을 1979년에 다시 만든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곳은 원래 사람이 별로 없는지 너무 한적합니다.
바람부는 날씨라 그런지 너무 사람이 없어 쓸쓸하기까지 합니다.

묘지 뒤쪽으로 산책 코스가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 묘소 둘레를 크게 돌면 소나무 향기로 힐링하며 산책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미리 준비하고 훈련하고 나라를 구하신 이순신장군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고 발길을 돌립니다. 이곳에서 약 8km정도 떨어진 곳에는 현충사가 있으니 관람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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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시국 가이드 투어

베드로 대성당 입구의 모습-너무 큰 규모의 성당에 놀랐습니다.


베드로 대성당 돔위를 올라가서 바티칸시국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가히 예술적인 나라입니다.

계단이 많아 힘들게 힘들게 올라갔는데,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나 상쾌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성모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예전에는 유리가 없었는데 한 관객이 망치를 휘둘러 유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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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 하수구가 얼었다고 합니다.

1월~2월 초 혹한으로 변기 하수구가 얼은 것이라고 합니다.

우연히 학교에 걷기 운동하러 갔다가 보게 되었습니다.

변기 하수구 속에 스팀 발사하는 기계를 넣고 얼음을 녹이고 있습니다.

그러기를 30분~1시간 하니

변기 하수구에서 오물이 조금씩 쏟아져 나옵니다.

이야! 

이런 분이 계셔서 우리가 좀더 편하게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옆에 서 있었는데 일단 냄새가 장난이 아닙니다.

유치원 변기가 얼었다고 하시며

오물이 조금씩 쏟아져 나오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일하시는 그 아저씨 

정말 대단합니다.

이 아저씨 덕분에 유치원 아이들이 화장실 마음대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는 내내 아저씨의 신발이나 옷에 오물이 뭍을까봐 조마조마했습니다.


오물이 있으니 사진 보시는 것 조심하세요. 


<축구 전쟁>

축구 때문에 전쟁한 두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1969년 7월 14일 발발)

1970년에 개최되는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최종전이 열렸다.

월드컵 처녀 출전을 위해 총력전으로 맞붙은 두 나라는

원래부터 영토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라이벌 의식이 강한 두 나라가 본선 진출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대결을 펼친다.


1차전-온두라스 승리

개최지: 온두라스

승리국: 온두라스가 1대0으로 승리

경과: 엘살바도르 선수들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잘 뛰어다니지 못함.

 그 이유는 경기 전날 밤 온두라스 극성팬들이 엘살바도르 선수들이 묵고있는 호텔에 찾아와

밤새도록 시끄럽게 타악기를 연주하는 등 엘살바도르 선수들이 잠을 잘 수 없었음. 

 다음날 엘살바도르 선수들이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음

사람들은 온두라스의 매너없는 행동을 강하게 비난함.


2차전-엘살바도르 승리

개최지: 엘살바도르

승리국: 엘살바도르가 3대0으로 승리

경과: 경기 전날 밤 엘살바도르 극성팬들이 온두라스 선수들이 묵고 있는 호텔에 찾아와

쥐를 던지거나 시끄럽게 하여 온두라스 선수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함. 

온두라스가 중계방송하면서 계속 엘살바도르를 비난하자 

엘살바도르 관중들이 온두라스 관중들에게 몰려가

폭력을 행사하여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함.

당일 경기: 온두라스 선수들은 제대로 뛰어다니지 못하고 3:0으로 패배함

-경기가 끝난 후 온두라스에 거주하고 있는 엘살바도르인들이 온두라스인들에게 무차별 테러를 당함

6월 23일 두 나라는 단교를 선언함


3차전-연장 혈투 끝 엘살바도르 승리

개최지: 멕시코

승리국: 2:2 무승부 후 연장전에서 엘살바도르가 1대0으로 승리

당일 경기:

 - 멕시코 경찰들이 엄청 많이 투입되어 경기장 질서유지 시킴

 -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선수들은 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혈투를 벌임.

 - 연장전에서 엘살바도르 승리


축구전쟁 발발

-축구 경기가 끝난 후 양국 간 국민 감정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

-온두라스인들의 엘살바도르인들에 대한 무차별 테러 심화. 수십명 목숨 잃음

-분노한 엘살바도르 정부는 7월 14일 전쟁을 선포하여 개시함

-4일동안 벌어진 전쟁이라 100시간 전쟁이라고도 함

-사상자: 17000여만명

드레스덴 폭격

1945213일 

영국, 미국 등 연합군은 엘베 강변의 피렌체’, ‘독일의 피렌체라고 불리우는 독일의 드레스덴을 폭격하기로 결정합니다.

이곳은 연합군의 폭격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몰려 들었던 도시입니다.

또 일설에는 히틀러가 사랑한 도시라서 연합군이 의도적으로 폭파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중소도시입니다. 이 공습으로 드레스덴 전체 건물의 90%가 파괴되었습니다.

이를 드레스덴 폭격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폭격의 위력은 어마어마했습니다.


블록버스터는 어디에서 왔을까?

원자폭탄 1개에 맞먹는 폭탄을 퍼부었는데 융단폭격과 블록버스터의 어원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블록버스터는 SF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용어입니다.

많은 제작비와 화려한 컴퓨터그래픽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영화를 흔히 블록버스터라고 하는데 이 말은 드레스덴 폭격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블록버스터의 뜻은 초대형폭탄이란 뜻인데 한 블록을 bust 할 만큼 화력이 센 폭탄을 말하는 것입니다.(bust는 부수다의 뜻)

 

블록버스터급 융단폭격을 실행한 사람은 영국 공군 원수인 아서해리스였습니다.

물론 미국 공군도 함께 공격을 하였습니다.

아서해리스의 전략은 드레스덴 등 여러 독일의 도시를 무차별 폭격으로 독일인들의 공포심을 조장하고 나아가 반란을 일으켜 나치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블록버스터급 융단폭격작전은 여러 차례 진행되어 독일 도시들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죄 없는 민간인까지 희생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서해리스에 대한 평가

이에 아서해리스에 대한 평가는 둘로 나뉘어집니다

아서해리스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히틀러의 런던 폭격에 대한 반격이므로 전쟁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옹호합니다.

비판론자들은 전쟁의 승패가 완전히 기울어졌는데 굳이 도시를 폭격하고 민간인을 학살할 필요가 있었느냐고 비판을 합니다.


<성모교회>



-바로 앞에 종교개혁가 루터의 동상이 있습니다. 루터교 교회로서 개신교 교회입니다.

-교회 왼쪽 돌을 보면 드레스덴 폭격으로 검게 그을린 돌을 그대로 재사용하여 재건하였습니다.

-대부분 성당이나 교회는 측면이나 후면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정면에서 파이프오르간이 위치하고 있더라구요. 

-이곳은 바흐가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했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성모교회 뒤편 지하에는 한국어 메뉴가 있는 식당이 있습니다. 그럭저럭 맛있습니다.



드레스덴 성당



드레스덴 성당의 모습

-루터교의 개신교 교회와 얼마떨어지지 않은 곳에 성당이 있어서 그럴리 없겠지만 신구교간 대립이 혹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슈탈호프 외벽에 그려진 작센의 베틴가 군주 행렬 


<요하노임과 슈탈호프의 군주의 행렬>

-거리 102m,  높이 9.5m의 거대한 벽화입니다.

벽화라고 해서 그림이라기 보다는 마이센 타일로 만든것인데 약 25000장이 소요되었습니다.

마이센 타일은 일종의 자기입니다. 마이센도자기는 알아주는 명품이지요.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에도 훼손되지 않은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업적이 뛰어난 군주는 말이 앞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나폴레옹 초상화를 보면 말이 앞발을 높게 들고 있는데 그걸 생각하면 됩니다.)


<젬퍼 오페라하우스>



-1803년에 태어난 건축가 젬퍼가 만든 것을 재건한 것입니다.

-바그너의 초기 음악작품이 이곳에서 시연되었습니다.  바그너와 젬퍼는 절친입니다.


<츠빙거 궁전>

드레스덴에 위치한 바로크 건축의 대표적인 궁전으로 특히 요정의 샘이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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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동굴은 어른 11,000

중고등학생 7,000

초등학생 5,000원의 입장료를 받습니다.

 

동굴에 들어가기 전 우선 고수동굴 방문객 센터에서 동굴 관련 기본 정보를 습득한 후 동굴 탐험을 실시합니다.

 


경사가 있고 계단이 많기 때문에 기초 체력이 있어야 동굴 탐험이 무난합니다.

무릎이 아프거나 연로하신 분은 약간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또 경사가 급한 계단도 많아 고소공포증이 있는 분들은 무서워 하더라구요.

동굴 안에는 화장실이 없으니 미리 화장실 갔다가 입장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동굴 탐험 시 장갑을 끼고 앞사람과의 간격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안전에 유의하십시오.

 

천연기념물 256호로 지정된 고수동굴은 석회암 동굴로서 약 200만년전에 생성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바위들도 많이 있으니 한번 찾아보며 탐험하면 좋습니다.

여름에 들어가면 엄청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겨울에는 따스하다고 합니다.

 

동굴 속의 물방울이 고드름처럼 자란 종유석

물방울이 바닥에 쌓여 솟아오른 석순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면 기둥이 되는데 이것이 석주입니다.

 

고수동굴에서 수호신인 사자바위(아래 사진에 사자바위 있습니다.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종유석과 석순이 만날 듯 말 듯 상태의 사랑바위 등등 볼 것 많은 고수동굴.

 

볼 것 많고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단양으로 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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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동백나무 꽃으로

가을에는 상사화로 유명한 고창 선운사

이 절은 3가지의 창건 설화가 있습니다.

 

첫째,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내려 놓고 도솔산(현재는 선운산)을 찾아 

동굴에서 잠이 들었는데

미륵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 중애사라는 절을 지었는데 그게 선운사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입니.

하지만 그 당시는 신라와 백제는 엄청 사이가 좋지 않았지요

진흥왕이 백제 땅을 빼앗고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까지 전사하게 만들었으니....

그런데 진흥왕이 백제 땅인 선운사에서 지냈다는 것은 좀 앞뒤가 맞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여기 동굴까지는 눈 때문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둘째 , 선운사의 참당암은 스님들이 참선하고 공부하는 곳입니다.

 이 참당암에서 공부하던 신라의 의운국사가 세웠다는 설도 있습니다.


셋째, 검단 선사가 용이 살던 연못을 메운 뒤 절을 세웠는데 그곳이 선운사라는 설입니다.

원래 선운사 자체가 용추라고 불렸는데 용이 살던 연못이었다고 한다

이 연못에 살던 용을 검단 선사가 쫓아내는 과정에서 주변 마을 사람들이 눈병에 걸리게 됩니다.

치료할 방법도 마땅히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용추 연못에 돌과 숯을 넣은 후 눈병이 나았다고 합니.

그 소문을 듣고 눈병환자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어 연못에 돌과 숯을 넣어 연못을 금방 메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검단선사가 그곳에 선운사를 세웠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용이 살던 연못이라...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용은 물에서 노는 동물, 이 물은 농업에서 꼭 필요한 것이므로 이 당시가 농경사회임을 의미합니다.

용이 살던 연못을 메꿨다는 것은 

새로운 신앙 즉 불교과 기존 신앙인 토착 신앙을 몰아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천연기념물 동백꽃 군락으로도 유명한 선운사

벌써 5번도 넘게 찾았습니다.

이번 겨울에 찾은 선운사는 늘 그렇듯이 조용히 저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찬 눈보라가 갑자기 불어서 관람객도 거의 없고 

대웅보전도 닫혀 있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절을 나섰습니.

선운산의 등산코스도 참 좋은데.....

이번 봄에나 다시 찾아서 장어도 먹고 가까운 석정온천에서 힐링 여행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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