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제국의 탄생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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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0년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쿠라이시 부족의 하심 가문에서 무함마드라는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메카는 지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중심지나 본산지의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메카는 무함마드가 태어난 곳으로 나중에는 이슬람교의 성지가 됩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을 무슬림이라고 하는데 무슬림들은 일생에 한번 성지순례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무함마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삼촌을 따라 상인의 길을 걷다가 청년기에는 목동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5세의 나이에 40세인 부자 미망인과 결혼을 합니다. 이제 물질적으로 풍요해졌습니다. 하지만 뭔가 그를 허전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족할 수 없었던 허전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수행의 길을 떠납니다. 그러던 무함마드가 40살이 된 610년, 여느 때처럼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40살의 무함마드에게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무함마드는 곧 대천사 지브릴(가브리엘)에게 하나님(알라)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알라는 아랍어로 하느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슬람교의 알라는 크리스트교의 하나님하고 동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트교에서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과 같은 신앙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이슬람교에서 예수는 무함마드와 같은 예언자 중 한 명이라고 여깁니다. 즉 이슬람교에서는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를 무함마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함마드는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듣고 겁에 질렸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언자임을 깨닫습니다. 무함마드는 자신의 부인을 시작으로 이 신생 종교를 포교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메카는 상업도시이며 다신교가 유행하던 도시 빈부의 격차가 심하던 도시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무함마드는 평등 사상을 전파합니다. 그러나 유일신 알라를 믿으라는 그의 포교활동에 다신교를 믿던 메카의 사람들이 무함마드를 몰아냅니다. 무함마드는 저는 당신의 영광에서 위안을 구합니다. 당신 이외는 어떤 힘도 없습니다. 라고 기도를 합니다. 무함마드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집니다. 

622년 메카에서 쫓겨난 무함마드가 북쪽의 메디나로 이동하는데 이를 헤지라라고 부르며 이 해가 바로 이슬람력의 원년이 됩니다. 메디나로 간 무함마드는 이곳에서 포교활동에 성공을 합니다. 그후 메디나에서 힘을 키웁니다. 무함마드는 역경을 극복하고 사람들을 이끈 뒤 자신을 쫓아냈던 메카를 정복하고 우상을 파괴합니다. 이 전투의 이름이 바드르 전투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 무함마드가 메카인들의 반격을 받기도 하지만 이미 이슬람교는 많은 사람들의 신앙으로 확산 중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메카인들은 무함마드를 인정하고 무함마드 군대는 630년에 메카로 무혈입성합니다. 이후 활발한 선교 및 정복활동으로 예언자로서 열정적인 삶을 살다가 무함마드는 632년 메디나에서 눈을 감습니다. 경전인 코란이 지배하는 종교사회로 무슬림들은 메카를 향애 절을 하고 라마단 기간에는 해질 때까지 음식을 먹지 않으며 가난한 자에게 기부하고 일생에 한번은 성지순례를 합니다. 우상 숭배를 금지하여 신전인 모스크에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를 그리지 않고 기하학적인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하고 첨탑을 세워 모스크의 권위를 나타냈습니다. 

 무함마드가 죽고 나자 그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툼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주도권을 잡은 메디나 세력이 무함마드의 장인이자 최측근인 아부 바크르를 새로운 칼리프로 선출하였다. 정통 칼리프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죽음을 틈타 여러 부족들이 반역을 꾀하였는데 알람의 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맹활약과 꾸준한 정복활동으로 이슬람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영토가 매우 넓어집니다.

 656년 높은 세금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3대 칼리프인 우스만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4대 칼리프로 선출하였습니다. 이때 알리의 칼리프 선출에 불복한 세력들이 반기를 들어 이슬람 제국은 결국 내전이 시작되게 됩니다.

 내전 도중 칼리프인 알리가 반란 세력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자 분노한 신하가 알리를 암살하였습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칼리프 직위를 넘겨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661년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가 이슬람 제국의 새로운 칼리프로 즉위합니다. 새로운 왕조 우마니야 왕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무아위야 1세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고 칼리프 선출제를 폐지하고 아들에게 칼리프 직위를 물려주는 칼리프 세습제를 확립합니다. 한편 알리와 무아위야의 내전 당시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족인 알리를 지지하는 세력이 따로 분리된 세력이 있는데 그들을 시아파라고 부릅니다. 기존의 이슬람 세력은 수니파로 시아파와 오늘날까지 갈등하며 종교 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우마이야 왕조는 5대 칼리프인 아브드 알 말리크 이후부터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합니다. 8세기 초에는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스페인과 포르투칼 지역까지 정복하여 이슬람 대제국을 건설합니다. 북진하여 프랑크왕국까지 공격하지만 패배하여 유럽 정복의 꿈은 이루지 못합니다. 이 전투가 투르 푸아티에 전투입니다. 이슬람 제국은 정복지의 주민들에게 차별을 가한 결과, 곧 반란에 직면하게 됩니다. 반란을 주도한 압바스 가문의 아부 알 압바스는 무함마드의 삼촌의 후손으로 그는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를 물리친 후 칼리프 마르완 2세를 몰아냅니다. 그리고 750년에 새 칼리프로 즉위합니다. 새로운 왕조 압바스 왕조의 시작입니다. 이때 간신히 살아남은 우마이야의 왕족 압드 알 라흐만은 이베리아 반도의 알 안달루스로 도망쳐 우마이야 왕조의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긴 새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 제국은 비 아랍계 무슬림 차별을 완전히 없애고 모든 무슬림들을 평등하게 대하였습니다. 거대한 영토를 거느린 압바스 왕조는 동쪽의 당나라와의 탈라스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하였습니다. 8세기 말에 즉위한 5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가 다스릴 때에는 문화 부흥까지 이루어져 이슬람 제국의 황금기가 됩니다. 동양과 서양을 잇는 실크로드로 인해 많은 문물들이 유입된 바그다드는 교역과 문화의 중심도시로 번창합니다. 유럽에서 건너온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들도 번역되어 이슬람 문화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9세기 중반에 용병으로 고용된 유목민 튀르크계 군인인 맘루크들이 칼리프 친위대의 권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결국 909년에는 시아파 세력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을 앞세워 북아프리카에 독자적인 나라인 파티마 왕조를 건국하여, 이슬람 세계는 동쪽의 압바스 왕조와 서쪽의 파티마 왕조로 분열되고 맙니다.

  이후 계속된 시아파의 공격에 시달린 압바스 왕조는 11세기 중반 아시아에서 건너온 유목민 튀르크족이 세운 나라 셀주크 투르크에게 수도 바그다드를 빼앗겨버렸고, 이후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셀주크의 지도자에게 칼리프보다 한 단계 낮은 정치지도자의 칭호인 술탄을 부여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슬람의 맹주가 된 셀주크 투르크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을 맹공하자 겁을 먹은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교황청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것이 1095년부터 시작되어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의 서막입니다. 로마교황청 뜻을 따른 연합군이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고 기독교 왕국들을 세우지만, 12세기 후반에 아이유브 왕조를 세운 살라딘이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합니다. 이후 기독교 세력의 십자군 원정은 뜸해졌으나 13세기 초중반에 동쪽의 몽골군이 뛰어난 기마술과 용병술로 중동지역을 장악합니다. 1258년에는 압바스 왕조도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였고, 한때 세계의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던 바그다드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맙니다. 몽골이 한 차례 휩쓸고 간 중동지역에는 일한국이라는 몽골인의 나라들이 생겨나는데 오래가지 않아 내분으로 멸망합니다. 

  한편 셀주크 투르크의 몰락으로 여러 작은나라들이 난립한 오늘날 터키의 아나콜리아 반도에 있는 오스만제국이 주변국들을 정복하며 점차 성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453년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킵니다. 이윽고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정복하고 동쪽의 사파비 왕조의 페르시아를 격파하며 이슬람 세력의 맹주가 됩니다. 16세기 초반 쉴레이만 1세 때에는 정복과 문화 부흥이 동시에 이루어져 오스만 제국은 전성기를 이루게 됩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거지인 빈을 두 차례나 공격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갑니다. 내부에서는 술탄의 근위대인 예니체리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져 이들이 술탄을 제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바뀌는 정도까지 이르릅니다. 이러는 사이 유럽 국가들에게 뒤처져버린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초반에 그리스와 이집트의 독립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나라의 힘을 재정비하고자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술탄 압둘마지트 1세가 1839년에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한 탄지마트 개혁을 실시합니다. 하지만 이후 오스만 제국은 크림전쟁과 이어진 러시아 - 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에게 패배하여 발칸반도의 영토들을 거의 잃어버립니다. 그러자 발칸반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열강들이 충돌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만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오스만 제국은 영국에게 구입하기로 한 전함을 영국이 양도하지 않자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반대편인 독일의 편으로 참전하게 되는데 결과는 1918년에 패전국이 되어 영토가 산산조각 나게 된다. 그리고 난후 그리스군의 침공까지 받은 오스만 제국은 아타튀르크가 그리스군을 무찌르고 터키공화국을 수립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게 됩니다.
 중동지방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중동에 식민지들을 거느린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밸포어 선언을 합니다. 즉 오스만 제국에 같이 맞서 싸우면 유대인들의 나라를 세워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체결하여 아랍인들의 나라를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렇게 모순된 이중 계약으로 전쟁 이후 중동지역은 겉잡을 수 없는 혼란이 찾아오게 됩니다. 1948년 영국의 밸포어 선언대로 유대인들은 고향인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나라 이스라엘을 세웁니다. 그러자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내세운 아랍국가들이 반발하여 이스라엘과 여러 차례 중동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1979년 시아파의 맹주 이란에서는 호메니이가 팔라비 왕조를 몰아내는 이슬람 혁명을 일으킵니다. 이웃나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과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등 미국에 맞서다가 축출되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후로도 중동은 석유를 둘러싼 이권 다툼, 이슬람 종파의 갈등,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와의 싸움, 내전 등 복잡한 문제들을 떠안은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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