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절, 탑에 대하여 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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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는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우리 전통문화 깊숙하게 자리잡아 발전해 왔습니다. 불교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절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절은 불교 문화를 이해하는 가장 첫걸음이 됩니다.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왕실은 정치적인 이념으로, 백성들은 극락에 대한 염원을 주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각지에 절이 생겨납니다. 불상을 세워놓고 스님들이 절에 머물면서 불교의 경전을 공부하고 설법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인도에서 절의 건립은 불교가 생긴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불교의 기본 가르침인 무소유의 원칙으로 절을 세우지 않았지요. 석가모니가 기본 설법을 전파하며 돌아다닐 적에는 신도들에게 얻어 먹는 걸식, 나무 아래에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명상인 수하좌, 다른 사람이 쓰다가 버린 옷감으로 옷을 해 입는 분소의, 소의 오줌을 발효시켜서 만든 약을 복용하는 부란약 등의 4가지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며 행동했으므로 절이라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인도의 우기가 찾아오면 전국을 돌아다니며 설법을 전파하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비는 오면 다함께 이동하며 수행하는 생활이 불가능하고, 또 우기에 설법을 위해 돌아다니다가 빗물때문에 땅으로 올라온 곤충이나 벌레를 발로 밟아 죽이는 일까지 발생하였습니다. 불교에서 금지하는 살생을 스님들이 행하는 것이지요. 이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기에는 밖으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는 계율이 생겨나고, 스님들을 한 곳에 모아 생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곳에 모여 생활한 곳이 절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최초의 절은 죽림정사입니다. 아무리 한 곳에 모여 생활하는 절을 세웠다 할 지라도 무소유를 기본 가르침으로 삼고있는 불료에서 절을 세우기에 충분한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충 지어 살고 있다가 돈이 많은 신도들의 기부로 죽림정사라는 절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국 절의 기원은 우기에 스님들이 밖으로 다니며 설법하지 말고, 모여서 생활하기 위해 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들이 돈이 없어 경제력이 빵빵한 신도들에 의해 그럴듯한 절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모여서 함께 생활하기 위한 목적으로 절을 세웠으나 차츰 종교적인 행사를 하기 위한 장소로 절의 기능이 바뀌어 갑니다. 그리하여 불상도 만들고, 탑도 만들고, 커다란 건물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의 절은 대부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조용한 산 속에 지어졌습니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도시 속에 절이 위치하여 사람들이 언제든지 찾아가 설법을 듣거나 수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가르침에 의해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억압을 받기 때문에 절이 산 속에 지을 수 밖에 없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는 불교적인 교리에 의해 산 속에 짓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불교는 일상 세계에서의 개인적인 이익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 보다 개인적인 수양을 통해 불도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럴려면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시보다는 조용한 산 속에서 수양하고 공부하는 것이 더욱 알맞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풍수지리학상 좋은 산에 절을 세우면 나라가 안정되고 부강해진다는 믿음에 의해 산 속에 절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절이 산 속에 위치한 것은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불교교리와 풍수지리학상의 원인도 많다고 생각됩니다.

  절에 가면 대웅전 앞에 탑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탑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었을 때 사리를 넣기 위해 돌을 쌓아 올린 것이 그 출발점입니다.석가모니의 사리를 넣은 탑은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불교 신앙의 대표적인 존재였습니다. 석가모니의 진짜 사리를 넣은 것이 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석가모니의 진짜 사리를 진신사리라고 하는데 아무리 많은 진신사리가 있다고 해도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올 수 있는 진신사리의 양은 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의 유품, 불교경전, 불교의 귀중한 물건 등을 탑 속에 넣고 탑을 세웠습니다. 이런 것을 법신사리라고 합니다. 법신사리도 진신사리와 함께 귀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즉 진신사리가 부족해지자 법신사리를 넣어 탑을 조성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초창기 탑은 목탑으로 추청되고 있습니다. 목탑은 석탑에 비해 만들기 쉽다는 이유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목탑은 재질의 특성 상 오래가지 못하고 화재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백제에서는 만들기는 어렵지만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 미륵사지석탑을 만듭니다. 신라에서도 많은 석탑을 세우게 되는데 이는 불상과 함께 탑이 불교의 중요한 숭배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탑은 상륜부, 탑신부, 기단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가 몇 층석탑이다. 라고 이름 짓는 것은 탑신부의 몸돌이나 지붕돌의 개수를 보고 몇 층석탑이다 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불국사와 불국사 3층석탑이 기억에 남습니다. 불국사는 10번도 넘게 찾은 곳이고 또 경내를 산책하면서 맡을 수 있는 나무 향기와 적당히 인파로 붐비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곳에 있는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은 화려한 이미지는 없지만 아무런 장식이 없어 오히려 다보탑보다 좋아 보입니다. 처음에는 다보탑이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조금 더 석가탑에 눈길이 갑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굴된 석가탑이 꾸미지 않은 순수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참 좋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석굴암을 찾는 것도 빠질 수 없는 여행의 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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