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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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왕권은 무열왕 직계 자손들이 왕위를 독점 세습하게 되었으며 시중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상대등을 약화시켰습니다. 시중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맡아보는 집사부의 장을 말하는데 경덕왕 까지는 중시라고 하였고 이후 시중이라고 불리웠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 진골 출신의 왕으로 감찰기관인 사정부를 두었으며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부모 모두 왕족이면 성골, 한 쪽이 왕족이면 진골입니다.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신문왕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가 있다고 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김흠돌의 반역을 잘 진압한 후 귀족들을 숙청하였습니다. 신문왕때 중요한 것이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였다는 점입니다. 관료전은 현직 관리들에게 지급하고 퇴직하면 반납해야 했습니다. 녹읍은 관료들에게 지급했던 것인데 해당 논밭에서 세금을 수취할 수 있었고, 노동력과 공물 등 모두 수취할 수 있었습니다. 녹읍을 지급하면 당연히 귀족들의 입김이 세졌지만 왕권은 약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녹읍을 폐지하면 귀족들에게 들어갈 세금이나 공물 등을 나라에서 수취하게 되어 왕권이 강화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신문왕은 또 지방 조직을 완비하여 9주 5소경으로 정비하였으며 군사조직도 중앙군은 9서당, 지방군은 10정으로 정비하였습니다.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하였고 필수 교과목으로 논어와 효경을 공부하였습니다. 성덕왕 때에는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고 경덕왕 때 귀족의 반발로 다시 녹읍이 부활되어 귀족들의 권력이 다시 강화되었습니다. 원성왕 때에는 새로운 관료 선발제인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과 골품제의 모순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또 웅주(지금의 공주 지방) 도독이었던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이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웅주에서 난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김헌창의 난은 진압되어 실패하였습니다. 

 신라 하대에는 촌주, 몰락한 중앙 귀족, 지방의 군사력을 가진 세력과 해상 세력 등이 호족이라고 불리우며 독자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스스로 성주가 되거나 장군이 되어 그 지역의 행정과 군사력을 장악하고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기도 하였습니다. 또 아무리 뛰어나도 고위직으로 진출이 어려운 6두품들이 골품제를 비판하고 유교 정치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수용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반 신라적인 사고를 하거나 지방 호족들과 힘을 합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6두품 학자로는 3최로 불리우는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등이 있습니다. 

 진성여왕의 실정과 거듭되는 흉년과 국가와 지배층들의 핍박으로 농민들은 몰락하였고, 농민들은 노비가 되거나 초적이 되었습니다. 원종과 애노의 난을 계기로 양길의 난, 기훤의 난 등의 농민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계속되는 혼란 속에서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입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견훤의 압박으로 신라는 국가의 위신이 없어지고 신라의 관리나 장군들이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자 경순왕도 나라의 존립이 어렵다고 생각하여 고려로 투항하였습니다. 하지만 태자였던 마의태자는 끝까지 반대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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