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 유해 국내로 봉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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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 유해 국내로 봉환


​봉오동 전투는 일제 식민지 기간 청산리 전투와 더불어 독립군의 혁혁한 전과를 올린 전투이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한경세가 이끄는 대한신민단 등 독립군 연합군이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를 크게 이겼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국내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독립군들이 만주와 간도 지방을 중심으로 독립 무장활동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1920년 5월부터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대한신민단이 일본군 순찰 소대를 습격했고,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는 삼둔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섬멸했다.

봉오동에서 일본군 섬멸

이에 일본은 독이 오를대로 올라 월강추격대대를 꾸려 독립군 근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하려 했다. 당시 봉오동은 중국 영토였는데도 일본은 아랑곳하지 않고 봉오동 공격을 감행했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들을 적재적소에 매복시킨 후 삼면에서 포위하여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최초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투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독립군은 크게 사기가 높아져 독립 무장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벌어진 북로군정서군을 이끄는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에도 합세하여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후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의 간토토벌에 맞서 전투를 벌이다가 러시아 자유시로 넘어갔다. 이 당시 독립군들은 자유시 일대로 모이고 있었는데 소련의 볼세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항일 무장운동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지도부의 다툼과 무장 충돌로 소련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여운형, 조봉암, 김규식 등 50여명의 독립군들과 함께 레닌을 만나 권총과 금화, 레닌이 쓴 조선군 대장 친필을 받았다. 공산주의 소련과 결탁하였다는 이유로 해방 후에는 남한 정부의 철저한 배척을 받았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

1923년 군복을 벗고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1937년 홍범도 등 한인들은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를 당해 연해주를 떠나 카자흐스탄까지 이주한다. 카자흐스탄에서 고려극장의 수위로 일하며 어렵게 생활을 했다. 일설에는 고려극장 수위를 할 때 홍범도 장군의 이야기를 그린 연극을 상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늙으막 수위로 일할 때 자신의 이야기가 극장에서 펼쳐질 때 어떤 생각을 했을지, 관객들은 수위가 홍범도 장군이라는 것을 알아나 봤을지.....참으로 안타까운 노년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렵게 카자흐스탄에서 생활하다가 홍범도 장군은 이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3년 7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남북한 모두 배척 당한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이 세상을 떠​나고 조국이 해방되었어도 소련군 소속이었고 레닌에게까지 선물을 받은 전력으로 남한 정부의 배척을 받았다. 북한에서도 홍범도 장군의 항일 운동을 크게 부각되면 김일성의 입지가 약해질 수 있으므로 배척을 받았다. 남북한에서 모두 환영받지 못했으나 그나마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계속 외면을 받아왔다.

그러다가 1993년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와 유해 봉환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다할 성과가 없다가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순방과 관련하여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문제를 다시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과 연계하여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틀 간 추모 기간을 가진 후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다고 한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16-17일 이틀간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하여 17일 문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다고 한다.

독립운동을 하던 항일 애국지사인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늦게나마 고국에 돌아온다니 참 감사하고 기쁜 일이다. 타국에서 고향땅을 그리워하고 계셨을텐데 고국에서 이제 평안하셨으면 좋겠다.

봉오동 전투가 먼저 일어났다.

학창 시절 시험 문제에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그외 역사적 사건 등 4개 정도 늘어놓고 일의 순서대로 나열하라는 문제가 자주 출제되었다.(지금은 모르지만) 그러면 봉오동이 먼저인지 청산리가 먼저인지 헷갈렸다. 그래서 난 봉오동의 , 청산리의  중 국어사전에  이 먼저 나오니 봉오동 전투가 먼저 일어난 일이라고 외웠다.

또 다른 방법은 간단하게 서울 봉천동으로 외워도 된다. 봉천동이니 봉이 먼저, 그러니 봉오동 전투가 먼저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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