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스트로이카 단행하여 냉전 종식 이끈 고르바초프 사망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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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스트로이카 단행하여 냉전 종식 이끈 고르바초프 사망 이유는

이마에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던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노환으로 오랜 투병 끝에 향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고르바초프는 소련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개방 정책, 동서독의 통일을 용인, 미국과 군축협상 등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고르바초프는 누구

1932년 러시아 스타브로폴 지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소년기에는 직접 콤바인을 운전하며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생활했다. 그러다가 모스크바대학 법학을 전공하고 21세에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출세를 기초를 닦았다. 대학 졸업 후 고향 스타브로폴에서 공산당 조직원으로 일을 했다. 그의 고향은 공산당 지도부가 즐겨 찾던 휴양지였기에 열심히 일하는 그를 눈여겨 본 지도부가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격시켰다.

1980년에는 정치국원까지 올랐는데 이 자리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982년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사망한 후에는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집권했다. 이때는 2인자 역할을 충실히 하다가 체르넨코가 사망한 1985년 드디어 소련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1985년 54세때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여 개혁 개방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를 단행했다. 또한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는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실시했다.
과거 공산당 서기장들은 동유럽 공산국가의 맹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동유럽에 대한 군사적 영향력을 포기하고 동서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키고 동서독 통일을 용인했다. 

고르바초프의 이런 노력으로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당 1당 체제를 탈피하고 선거를 치르는 국가로 바뀌었다.
1988년 5월에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했던 소련 군을 철수시키기 시작하여 1989년 2월에 완전 철군했다.
우리나라와는 1990년 한소 수교를 맺기도 했다.


미국 조지 부시대통령과는 1991년 전략핵무기 감축 협의에 서명하여 상호간 군축 합의를 이끌었다.
이런 여러가지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세계 평화에 힘쓴 공로로 1990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사회주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고자 했던 것이다. 1990년 급진주의자들은 <샤탈린의 5백일 개혁안>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고르바초프는 이를 거부하여 급진개혁파와 사이가 벌어졌다.

1991년 8월에는 크림반도에서 여름휴가를 즐기고 있을 무렵 쿠데타가 일어나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쿠데타는 곧 진압되었으나 고르바초프의 지도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경제 상황이 더욱 나빠지면서 민족 간 갈등이 일어나고 분리주의가 팽배해져 가면서 소련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소련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급진 개혁이었기에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서기장에서 물러나 1991년 고르바초프 재단을 만들어 학술 강연활동을 하였다. 
1996년 러시아 대선에 출마하여 보리스 엘친과 맞붙었으나 0.5%의 아주 미미한 지지를 받았다. 강력했던 소련을 패망시킨 장본인이라는 이미지때문에 득표율이 아주 저조했던 것이다.

고르바초프 퇴진

소련의 급진적인 개혁은 결국 경제난을 불러왔다. 이런 급진 개혁에 염증을 느낀 군부는 쿠데타까지 시도하였고, 정국은 날로 혼란스러워 갔다. 결국 1991년 12월 소련은 연방국가에서 해체되고 고르바초프도 대통령에서 물러났다. 
퇴임 이후 푸틴 정권을 비판하기도 해서 푸틴과는 관계가 그리 좋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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